질그릇 안의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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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 속에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탁월한 능력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고후 4:7)
모든 사람은 보배이신 하나님을 담는 질그릇이다. 그러나 질그릇은 보배의 빛남을 막을 수 없고 보배의 능력을 매장할 수 없다. 보배이신 하나님은 약한 질그릇인 사람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우시다.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면 우리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관념이 있어서 그러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힘을 다해 추구한다.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에 도달할 수 있다면 완전함에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웃어야 한다. 잠시라도 눈물을 흘린다면 그는 승리하지 못한 것이며 실패한 것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나 담대하고 두려움이 없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일에서 두려워한다면 믿음이 없고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조금도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근심한다면 그는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라는 관념을 갖고 있다.

영적인 역설(paradox)

그러나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런 관념은 우리가 만든 것일 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도 우리가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그릇을 본다. 그런데 이 질그릇의 특별한 점은 바로 보배가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보배는 질그릇을 초월하고 질그릇 위에 드리워져 있지만, 질그릇 속에서부터 그 자신을 뚜렷이 드러낸다. 이것을 기독교라고 부르며 이러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두려워하지만 또한 강하다. 그는 마음속에 괴로움이 있지만 또한 소망을 갖고 있다. 그는 사방에서 압박을 받지만 짓눌리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는 맞아 쓰러지지만 멸망하지 않는다(고후 4:7-9). 우리는 그의 연약함을 보지만 그는 “내가 약할 그때가 곧 강할 때”(고후 12:10)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가 예수님을 죽게 한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을 보지만, 그는 “예수님의 생명도 우리 몸에서 나타나게 하려는 것”(고후 4:10)이라고 말한다. 그는 악평과 호평을 받고, 속이는 사람 같지만 진실하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것 같지만 유명하다. 그는 죽는 것 같지만 살아 있다. 그는 징계를 받는 것 같지만 죽지 않고, 슬퍼하는 것 같지만 항상 기뻐한다. 그는 가난한 것 같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한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고후 6:8-10). 이것이 참그리스도인이며 이것이 참기독교이다. 이러한 역설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질그릇은 없고 단지 보배만 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질그릇이 가로막아서 전진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사상은 이렇게 양극단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보배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다.

모든 것에 충족한 은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가시가 있다고 말한다(고후 12:7). 우리는 이 가시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것이 바울을 연약하게 했다는 것을 안다. 그는 이 가시가 그에게서 떠나도록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 간청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가시가 네 몸에서 너를 약하게 하지만, 나의 능력은 사람이 약할 때에 온전하게 나타난다.”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나의 능력이 너의 약함 위에 장막으로 드리워졌다.”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분의 능력이 그의 약함을 숨겼고 그의 약함을 가렸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약함을 제거하지 않으며 오직 주님의 능력만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약할 때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한다. 그리스도인은 땅 위의 천사들 같은 새로운 종족이 아니라 오히려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이들이다.
한때 나는 몹시 심한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 있었던 적이 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내 병을 치료해 주시기를 구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고린도후서 12장에 이르게 되었다. 바울은 세 번이나 가시가 떠나도록 기도했지만, 주님은 그것을 치료해 주시는 대신에 “나의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셨다. 가시가 있을 때 주님은 그분의 은혜를 더하시고, 약함이 있을 때 그분의 능력을 더하신다. 침상에 누워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히 보여 주시기를 주님께 구했다. 그때 내 안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배가 떠서 움직이기 위해 약 3미터 높이의 물이 필요하다면, 그 높이의 물이 있어야만 그 배는 비로소 빨리 달릴 수 있다. 그러나 내 배가 가는 길에는 강바닥에 1.5미터 높이로 솟아 있는 암초가 있다. 나는 하나님께 간구하여 “주님, 만일 주님께서 허락하기를 원하신다면, 이 암초를 옮기셔서 이 배가 빨리 지나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주님은 “그 암초를 네게서 옮겨 주기를 원하느냐, 아니면 물이 1.5미터 더 불어나게 해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물이 1.5미터 더 불어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날부터 나의 많은 어려움들이 사라졌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암초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1.5미터 높이로 더 불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어려움과 시험과 연약함이 있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제거해 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긍정적인 면에서 우리에게 터무니없는 능력을 주시는 분도 아니시라는 것이다. 질그릇 속에 보배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약할 때에 나타난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에 관계없이 보배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나타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역설적으로, 보배는 질그릇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정말 아름답다. 질그릇이 없다면 보배가 그리 멋지게 보이지 않는다. 어떤 형제가 내게 “저는 어제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저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압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 저는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형제가 의심하는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의심이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사실상 진실한 믿음은 의심에 둘러싸여 있을 때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여기서 요점은 바로 질그릇인 사람과 보배이신 하나님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지 보배이신 하나님만 계신 것이 아니다. 여전히 의심이 있을지라도 믿음은 보배를 더욱 크게 나타내고 더욱 영광스럽게 나타낸다. 보배이신 하나님은 모든 질그릇으로부터 표현되실 수 있다. 이 영적인 역설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보배로운 점이다.

[한국복음서원에서 출간한 “워치만 니 전집”, 56권에서 발췌하여 편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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