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없는 행위는 죽은 것일 뿐 아니라 행위가 없는 믿음 역시 죽은 것이다. 죄인이 구원받은 일에서 이러하듯 믿는 이의 생활에서도 똑같다. 우리의 행위는 우리가 믿은 것을 나타낸다. 믿음과 행위가 일치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음은 행위를 통해서 표현된다. “믿음은 그의 행위와 함께 작용하였으며, 행위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대가 알고 있습니다.”(약 2:22) 가령 어느 믿는 이가 그저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한다고 하자.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14절) 여기에 두 가지 뜻이 들어 있다. 하나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멈추고 주님 안에 안식함
믿음이 있을 때 믿음과 부합된 행위도 당연히 있게 된다. 집에 불이 난 것을 믿는 사람은 여전히 방 안에서 평안히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불난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신다고 믿는다면, 그 일에 대해 우리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도, 여전히 계획하고 염려하며 근심한다면, 그의 믿음은 분명 거짓된 것이다. “믿은 우리는 그 안식에 들어갑니다.”(히 4:3) 믿음과 안식은 나뉠 수 없다. 언제든지 우리가 참으로 믿을 때 우리 마음은 안식하게 된다. 만일 우리 마음이 여전히 분요하고 불안하며, 진퇴양난으로 두렵고 떨리며 속수무책인 상태에 있는데도, 여전히 발버둥 치며 계획하고 부탁하며 무언가 하려고 한다면, 이것은 우리가 아직 믿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믿으면 안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믿으면 염려하지 않고, 분주하게 계획하지 않고, 다만 젖을 뗀 아이같이 어머니 품에 안식하게 된다. 믿음에는 행위가 있는 법이다. 믿음의 행위의 첫 걸음이 바로 자신의 행위를 멈추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 안에 안식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롬 8:31) 또한 안식하는 이유는 그가 자기의 무능함을 알고 염려나 분주한 계획이 자신의 상황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믿음은 자신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안식처는 하나님 자신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느냐가 중요하다.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는 믿음을 온전케 함
이제까지 말한 것들은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증명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제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한다는 면을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자연히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게 된다. ‘…하지 않는다’의 방면은 모두가 부정적인 면이다. 이 부정적인 면의 믿음의 행위는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이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다. 믿음이 있은 후에 또한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를 가져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적극적인 행함은 우리의 믿음과 일치되어야 한다. 또한 이런 행위는 우리의 믿음을 완성하며 더 빨리 하나님의 약속한 축복을 얻게 한다. 이것은 육체의 조급함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능력의 힘이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즉시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타고난 생명이 죽은 것이 실질적이지 않고 충분히 깊지 않다면 즉각적인 응답은 다만 우리의 혼 생명을 강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생명이 다시 활동할 모든 가능성이 끝날 때까지 하나님은 오래전에 약속하신 것을 지연시킬 수밖에 없으시다.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들은 우리 자아 생명에 치명타를 가하는 것이며 영적인 힘의 활력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의 성취를 촉진한다. 적극적인 믿음의 행위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얻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치료받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삶
가령 여러분이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병을 치료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하자. 이때 여러분은 자연히 적극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손안에서 잠잠하고, 사람의 방법으로 그분의 역사를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근심 없이 전능자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적극적인 면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걸음은 바로 정상인처럼 행하는 것이다. 참된 치유는 우리의 상태가 좋아질 때가 아니라, 우리가 치유받았음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께서 주실 그때이다. 만일 우리가 치유됐다면 마땅히 치유된 행위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얻을 때 하나님의 치유를 받은 정상인이 어떻게 행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장기간 침상에 누워 앓아야 하는가? 아니면 일어나 행해야 하는가? 여러분은 나은 사람처럼 행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얻은 후여야 하고, 또한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한 다음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패하게 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우리가 아주 궁핍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물통이 아니라 원천이신 주님 자신이다.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돈을 빌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롬 13:8) 가정의 평안이나 직업, 생계, 고난받음, 위험과 다른 부류의 일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일들을 돌보기 원하실 뿐 아니라 육신에 관련된 많은 문제들도 똑같이 관심하신다. 믿음의 특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믿음은 일이 성취된 후에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때에는 믿을 필요가 없다. 믿음은 일이 성취되기 전, 다만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므로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믿는 것이다. “받은 줄로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막 11:24) 얻은 후에 믿는 것이 아니라 아직 얻기 전에 이미 얻은 줄로 믿는 것이다. 이럴 때 참으로 얻게 된다.
믿음의 눈은 먹구름 위에 있는 햇빛을 봄
믿음의 눈은 하늘의 먹구름을 보는 것이 아니라 먹구름 위의 영원히 변하지 않는 햇빛을 본다. 육신의 눈은 눈앞의 흑암밖에 보지 못하지만 믿음의 눈은 빛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보는 것이다. 믿음으로 보는 빛이 세상이 보는 흑암보다 더 참된 것이다. 믿음은 모든 위험과 고난과 시련을 멸시한다. 왜냐하면 믿음은 그 결과를 알기 때문이다. 믿음의 행위는 위험을 무릅쓴 모험이 아니라, 가장 확실하고 실질적인 행위이다. 믿음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것을 본다. 참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얻고 믿음이 있는 믿는 이의 행위는, 꾸며 낸 것이 없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얻고 믿음이 있는 믿는 이의 행위는, 조금이라도 꾸며 낸 것이 없는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믿음의 행위는 종종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다.
[워치만 니 전집,1집 6권 23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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