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냐하면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고후 3:6)
가장 큰 차이점
성령으로 진리를 받는 것과 두뇌로 진리를 받는 것에는 대체 어떤 차이가 있는가? 1)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내려놓지 않으며, 온전히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서, 어떤 책이나 교사에게서 또는 성경 자체에서 진리를 받는 것은 두뇌로 진리를 받는 것이다. 두뇌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성령을 거치지 않고 직접 책이나 교사 혹은 성경에서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성경을 이해했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것이 죽은 것이었고, 하나님 앞에서의 산 체험이 없었다. 하나님의 영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읽는 사람은 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다. 2) 갈라디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율법을 지키는 데로 돌아갔다. 바울은 그들에게 “여러분이 그 영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들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까?”(갈 3:2)라고 물었다. 그들이 믿음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행위를 의지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또 한 마디를 물었다. “여러분은 … 그 영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온전하게 되려고 합니까?”(갈 3:3). 그들이 처음에는 성령을 의지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를 의지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두 질문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을 발견한다. 성령에서 나온 것은 모두 믿음에 의한 것이고, 육체에서 나온 것은 모두 행위에 의한 것이다. 육체가 행위와 하나이듯 성령은 믿음과 하나이다. 그러므로 두뇌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성령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전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고, 후자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진리를 두뇌로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이해하게 하지만 성령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이 믿도록 한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믿는 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생명과 능력의 근원이다. 이것은 우리가 특별히 중요시하고 항상 전하는 것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믿는 이가 적지 않고 이 진리를 위하여 특별히 간증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실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사람의 말은 그들의 체험을 드러낸다. 어느 형제는 자기가 주님과 함께 죽은 진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한번은 말씀을 전할 때 “여러분들은 죽어야 합니다. 죽지 못할 때에는 십자가의 힘으로 죽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아주 신령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알쏭달쏭한 말이다. 이것은 그가 함께 죽은 것에 대해 두뇌로만 이해했을 뿐 성령의 능력을 얻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왜 그런가? 이는 사람이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후에야 역사한다. 믿음이 먼저이고 사람 속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나중이다. 만일 사람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가 알고 있는 진리는 일종의 이상(理想)에 지나지 않는다. 성령은 아직 그 진리가 성취한 것을 그에게 이루지 않은 것이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서
여기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서를 본다. (1) 성경의 가르침 (2) 믿는 이의 믿음 (3) 성령의 역사이다.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두뇌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다. 그는 성경을 상고하거나 다른 사람의 말하는 것을 들을 때, 주님과 함께 죽은 이유를 깨닫고 죽은 이가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지만 그에게는 믿음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그의 옛사람의 위치를 분명히 볼 수 없고, 그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행위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결심한다. 그는 사람에게 권면할 때 쉬지 않고 여러분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한다. 때로 그가 조금 더 진보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실의 진실성을 이해하고, 그의 입으로도 자신이 이미 못 박혔다는 것을 시인할지라도, 행위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를 못 박았다는 사실을 믿기보다는 스스로 자신을 못 박으려고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받아들여진 진리라면, 그 진리는 그 사람의 체험이 된다. 성령이 어떤 진리를 계시하는 목적은 믿는 이에게 상고할 자료를 더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믿는 이를 이 진리의 내용 안으로 더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진리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없다면, 그 사람은 이 진리가 그의 두뇌 속에만 있을 뿐 성령의 능력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원리와 실재의 차이와 그 관계를 보아야 한다. 많은 원리들은 반드시 성령을 통해 계시받아야 한다. 그러나 축적된 사실들이 많이 있고 교사들도 많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통하여 영적인 생명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두뇌 안에 있는 것이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이런 원리들을 생활에 적용할 수 없다. 두뇌로 원리를 깨달을 수 있겠지만 오직 성령만이 이 원리를 적용시킬 수 있다. 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은 세계의 대도시와 농공상업의 분포도를 잘 알 수 있지만, 아마 그는 한 발자국도 문밖으로 나서지 않았을 수 있다. 사람이 두뇌로 성경을 상고하여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떤 체험도 가질 수 없다.
참된 영적인 일
오늘날 많은 설교 중에 심오한 것과 영적인 교훈이 가득한 것도 많으며, 신앙이 순수한 것도 많고 해설이 온전한 것도 많다. 동시에 듣는 사람도 어느 정도 감동을 받고 그들의 행위와 도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설교라도 사람의 지혜에만 의존하고 성령에서 나오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역대로 깊이 있는 사람이 말한 격언조차도 사람에게 격려를 줄 수 있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령이 역사한 결과가 아니다. 많은 사람의 설교가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왔다 할지라도,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 두렵다. 사람의 모든 것은 끝나야 하고, 사람 자체는 아무것도 아닌, 다만 십자가로 종결된 존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 되시고 모든 것을 소유하시며, 또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분께서 마땅히 모든 것이 되셔야 한다. 모든 것이 성령의 능력 안에 있어야 한다. 사람의 지혜로 행한 일은 다른 것에서는 왕성할 수 있을지라도 아무런 영적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손에서도 아무 유용성이 없다. 참되게 하나님께 속한 일은 오직 성령만이 하실 수 있다. 우리 사람의 지위가 작을수록 성령의 능력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성령이 오 분간 역사하시는 것이 우리가 백 년간 수고하는 것보다 더욱 영적인 유용성이 있다. 왜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밤낮 수고하는가? 왜 주님이 오셔서 명령을 하신 뒤에 그물 가득 물고기를 잡도록 기다리지 않는가?
[워치만 니 전집, 믿음의 문과 길, 5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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