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은혜의 시대에서 ‘은혜로’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은혜로’라는 뜻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사람은 구원받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일하는 자에게는 자기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당연한 보수로 여겨지”기 때문이다(롬 4:4). 하나님은 은혜를 따라 사람들을 대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을 위해 이루신 어떠한 ‘사실들’이 있다.
사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을 다 이루셨다.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떤 ‘사실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실들이 존재한다면 사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을 다시 성취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은 다 완전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의로운 은혜이기 때문에 여전히 이 사실들에 대해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어떠한 협력인가? 그것은 그분께서 ‘이루신 것’에 사람이 무엇을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실들을 참되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이루신 일들을 참되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실을 받아들이고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믿음은 ‘현금을 인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은행에서 수표를 현금으로 인출한다는 의미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수표를 주었다고 하자. 은행에 돈이 있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당신이 그 수표로 돈을 인출하는 것은 수표에 쓴 금액이 은행 계좌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현금 인출’은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으로 우리는 사용할 돈을 인출한다. 그리고 이제 그 돈을 사용하는 것은 ‘체험’이다. 은행 계좌에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들’이고, 수표에 금액을 써서 돈을 찾는 것이 ‘믿음’이고, 그 돈을 쓰는 것이 ‘체험’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 안에서 사람을 위해 이루신 일은 모두 사실들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은 이 사실들을 여전히 체험해야만 한다.
체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성취하신 사실들을 믿음으로 취한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들은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믿음이 꼭 필요하다. 사실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체험은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이같이 믿음은 하나님의 사실들을 사람의 체험이 되게 한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사실, 믿음, 체험’이다.
사실과 체험의 큰 차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체가 되신 분으로서 모든 신성한 미덕들의 완결이시고 모든 완전함의 총체이시다. 그분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생활은 곧 하나님의 생활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구원을 이루셨다. 어떤 사람이 주 예수님을 진심으로 주님과 구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그가 믿는 그 순간에 주 예수님을 받으신 것같이 그를 받으신다. 그때 주 예수님의 신성한 미덕들과 완전함이 믿는 이들 위에 임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주 예수님과 같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를 보시는 것처럼 보신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모든 일과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을 자신들의 소유로 갖는다.
히브리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사실을 설명할 때 특별히 간단명료한 비유를 사용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것들을 어떤 사람이 남긴 유언으로 비유한다(히 9:15~17). 유언은 유언을 받은 사람에게 ‘유산’을 준다는 약속이다. 유언을 남긴 사람이 죽기 전에는 그 유언은 효력이 없지만 일단 그가 죽으면 유언을 받은 사람은 유산을 받을 수 있다. 주 예수님께서 바로 유언을 남기신 분이시다. 그분께서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은 즉시 우리의 이름 아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에게서 얻은 사실이다. 비록 체험에서는 우리가 이 유산을 한 번에 모두 소유하지 못하고 그 유익과 공급을 누리지 못한다고 해도, 이 유산은 진정으로 우리의 것이고 우리에게 속하며 이미 우리의 이름 아래 있다. 이것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산을 누리는 것과 유산을 소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유산을 누리는 것은 ‘체험’이고 유산을 소유한 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을 얻은 것이 먼저이고, 누림은 그다음이다. 주 예수님은 죽음으로 그분의 모든 의로움과 거룩한 미덕과 완전함과 승리와 아름다움 등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그분처럼 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주 예수님을 받으시듯 우리를 받으셨다.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부터 이것은 사실이 되었다. 그러나 체험에 있어서는 우리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사실’이란 하나님께서 주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루시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업을 물려받은 사실을 소유하고도 이 유업을 누리는 체험을 갖지 못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받은 풍성을 사용하고 누리지 않는다면 체험에 있어서는 가장 궁핍한 사람일 수가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맏아들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의 좋은 예이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아들아,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너의 것이다.”(31절)라고 한 이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습니다”(29절)라고 한 이 말이 그의 체험이었다. 그가 부잣집 아들인 것은 그의 위치이자 사실이었지만,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도 누린 적이 없는 것이 그의 상태이자 체험이었다.
사실과 체험은 크게 다르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를 말하며, 체험은 우리가 실행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이들은 극단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주님 안에서 자신이 가진 풍성을 모르고,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것이 이미 자기 소유라는 것을 모르는 채, 은혜를 확보하려고 계획하고 구상한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온갖 종류의 의로움을 이뤄내어서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고 새 생명의 성향을 만족시키려고 한다.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이해하여 주님께서 이미 자신들을 높여서 비할 데 없는 위치에 두셨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만족하여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체험적으로 적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두 극단은 모두 그릇되었다. 체험을 중요시하고 사실을 잊어버리는 사람은 율법에 매이게 된다. 사실만 중요시하고 체험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은혜를 방자히 행하는 기회로 삼는다. 오늘날의 문제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성취하시고 승리하신 것들을 어떻게 체험하는가이다.
[워치만 니 전집,1집 1권, 6장, 한국복음서원]
본 내용의 PDF 형식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려면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