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종류의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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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은 일이나 열심이나
일의 좋은 결과가 아니다. 오직 십자가와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만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

“가인은 땅에서 거둔 산물을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고, 아벨도 자기의 양 떼 가운데서 첫 새끼, 특별히 그것의 기름진 부분을 제물로 바쳤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아들이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으셨다.”(창 4:3-5)

가인의 제물과 아벨의 제물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타락 후 자기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었다. 4장에서 그의 아들 가인이 행한 것은 아버지 아담이 행한 것과 같은 원칙에서였다. 가인은 자기가 농사지은 결과인 땅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렸다. 가인이 행한 것과 아담이 행한 것은 같은 것이다. 아담은 자신의 행위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가린 것이고, 가인은 하나님의 기쁨을 얻으려고 농사지어 얻은 소산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러나 3장에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아담과 하와에게 입히신 것은 십자가와 죽음이 그들 위에 역사할 것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4장에서 아벨은 이 길을 갔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진 부분을 하나님께 드렸다. 아벨에게 특별했던 것은 바로 그가 십자가의 필요를 인식했다는 것이었다. 아벨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땅히 죽어야 하고 죽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심을 얻지 못함을 알았다.
가인과 아벨이 제물을 드린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지만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는가? 그 이유는 아벨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대로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구했으나 가인은 자기의 육체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구했기 때문이다. 가인의 제물은 사람이 죄가 있는데도 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자신을 의지하여 행한 결과로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가인은 자기 행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뿐 죽음을 거치지 않았다. 가인은 자기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열납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벨이 드린 제물은 ‘나의 하나님이여 당신이 만드신 가죽옷은 나로 하여금 이 길을 알게 했습니다. 오늘 이 가죽 안에 있는 기름을 가지고 당신의 기뻐하심을 구합니다. 가죽은 나를 위하고 기름은 당신을 위합니다.’라는 의미이다. 가죽과 기름은 모두 죽음의 결과이다. 오직 죽음(십자가)만이 아벨로 하여금 입을 옷을 만들 가죽을 얻게 하며 하나님께 드릴 기름도 얻게 한다.

누가 가인인가?

로마서 8장 8절은 “육체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육체에 속한 사람도 선을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사람이 육체를 의지하여 어떻게든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가인처럼 제물 드리는 것을 열납하지 않으신다. 오직 당신의 십자가, 당신의 죽음만이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제물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름과 같이 향기로운 제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가장 큰 봉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할 수 있고 또 얼마나 성취할 수 있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죽을 수 있느냐에 있다. 아마 당신이 강조했던 것은 부흥이나 많은 사람의 회개나 허다한 큰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중요하긴 하지만 가장 우선적인 필요는 아니고 이차적인 필요이다. 첫째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주여, 나는 내 자신이 무익한 자이며 연약한 자이며 더러운 자임을 압니다. 나는 육체의 일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당신만을 앙망할 뿐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당신의 제단 위에 태워져 제물이 되어 당신의 기뻐하심을 얻기만을 구합니다.” 일의 성공과 열매를 가지고 십자가에 대한 인식을 대치하는 것이 바로 가인이다. 열심히 농사를 지은 가인은 확실히 성공했고 열매가 있었다. 그러나 가인에게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의 유일한 조건인 죽음이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체에 있는 자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시도할 수 있지만 결국은 할 수 없게 된다. 가인은 그런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지만 하나님의 열납하심을 얻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구하지만 단지 육신의 열심뿐이요, 그 속에 십자가의 표시나 죽음의 상흔(傷痕)이 없다.

누가 아벨인가?

그러나 어떤 성도들은 참으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을 접촉할 때 당신은 그가 깨어진 사람이요, 십자가의 상처가 있는 사람이요, 그에게 주관적인 체험이 있고 매 맞은 자국이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종류의 사람, 이런 표시가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열납되는 것은 일이나 열심이나 일의 결과가 아니다. 반드시 모든 것이 십자가와 성령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을 위한 사람의 노력의 결과를 받으실 수 없고, 오직 그분을 의지하여 나온 결과만을 받으신다. 다만 우리는 그분 앞에 엎드려서 “주여, 나는 통로에 불과하오니 당신이 나를 통과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축복이 있을 것이고 하나님의 열납하심을 보게 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된 할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빌 3:3)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육체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많았음을 보여 준다. 육체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가능하다. 가인이 바로 육체로 경배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육체로 경배하는 것을 받지 않으시고 성령 안에서 경배하는 것만을 받으신다. 우리의 잘못은 일의 좋고 나쁨으로 하나님의 열납하심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좋고 나쁨을 묻지 않으시고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인가를 물으신다.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 그들의 목적은 하늘에 속한 것이지만 그 목적에 이르는 능력은 땅에 속한 능력을 사용한다. 가인이 제물을 드린 것도 아벨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좋은 일이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그들이 무엇을 드렸는가에 있다.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의 부흥을 위한 것이므로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극히 큰 잘못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을 육체라고 말씀하신다. 육체는 그 사람 자신의 능력이며 그 본래의 모든 능력이다. 우리가 이런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가인이 드린 제물과 다를 것 없다.

[워치만 니 전집, 2집, 37권, 8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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