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는 두 종류의 생활 원칙을
보여 준다. 모든 문제는 당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밖의 옳고 그름을 좇고 있는가 아니면 내적인 생명을 좇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도 있더라”(창 2:9하)
사람이 살려면 양식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나무로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계신다.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는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두 종류의 양식이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생명으로 말미암거나,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으로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창세기 2장의 두 나무를 읽어 왔다. 그러나 우리가 관심하는 바는 이 두 나무는 우리에게 사람,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할 때 두 종류의 원칙으로 살고 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옳고 그름에 기준을 두고 생활하고, 어떤 그리스도인은 생명에 기준을 두고 생활한다. 사람이 옳고 그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생명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은 선과 악의 지식나무를 먹으면 정녕 죽지만 생명나무를 먹으면 산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생명을 말하는 것임
어떤 사람은 옳고 그름으로, 어떤 사람은 선악으로 말미암아 살고 있다. 옳고 그름이나 선악의 원칙은 기독교가 아님을 기억하기 바란다. 기독교는 생명을 말하는 것이지 선악이나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 생명을 얻은 후, 우리 속에는 매우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리 속에 또 하나의 생활 원칙이 생긴 것이다. 만일 이것을 모른다면 생명의 원칙을 한쪽에 제쳐 두고 옳고 그름의 원칙을 따르게 될 것이다.
옳고 그름의 원칙에 따른 생활
성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한다. “이 일을 한 것이 잘한 것인가, 못한 것인가? 옳은가, 그른가? 선한가, 악한가?” 당신은 선악의 여부를 묻고, 자기 자신이 한 일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를 묻는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에 대하여 그것이 선한가 악한가를 고려하고, 해도 되는가 안 되는가, 옳은 것인가 옳지 않은 것인가를 고려하고 있다. 당신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므로 아주 세밀히 숙고한 후에 그 일이 좋고, 선하고, 옳다고 느껴지면 그것을 행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특별히 그 선한 것들, 옳은 것들, 좋은 것들을 택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하는 것을 매우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선과 악의 지식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당신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선과 악을 분별하거나 택하고 거절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독교는 밖의 선악에 표준을 두는 것이 아니다. 내가 선을 택하든 악을 거절하든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은 율법이요, 세상의 종교요, 사람의 도덕과 윤리이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에 따라 사는 생활
기독교는 당신이 어떤 일을 할 때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묻는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새 생명이 당신 속에서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기이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다만 밖에 있는 선악의 표준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밖의 표준이 아니다. 기독교는 새로운 십계명을 얻는 것이 아니요, 새로운 시나이산을 얻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마땅히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계명을 걸어 놓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옳고 그름이나 선악시비(善惡是非)를 묻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어떤 일을 할 때 당신 속에 있는 생명이 높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 생명이 당신에게 말하고, 당신 속의 느낌이 옳다고 느끼며, 당신 속에 생명과 힘과 기름부음이 있고, 당신 스스로 생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많은 일들이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옳고, 타당하고, 선한 것이지만 기이하게도 당신 속의 그 생명은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식어지고 위축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속생명에 의해 사는 것이지 밖의 옳고 그름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 사람들, 곧 구원받지 않은 사람의 원칙은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옳고 그름에 불과하다. 만일 우리의 생활 원칙이 옳고 그름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것이다. 우리와 세상 사람들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밖의 표준이나, 밖의 율법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의 도덕이나 관념을 말하지 않고, 사람들의 평판과 견지에 의해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물어보아야 할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어떠한가이다. 그 생명이 내 속에서 힘이 나고 살아 움직이면 그 일을 할 수 있고, 그 생명이 내 속에서 식어지고 위축된다면 그 일을 할 수 없다. 나의 생활 원칙은 속에 의해 사는 것이지 밖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만족할 때까지
벼농사를 하고 있는 두 형제가 있었다. 그들의 논은 산 중턱에 있었고 다른 사람의 논은 산 아래 있었다. 그들은 아주 더운 낮에 논에 물을 대고 밤에는 잠을 잤다. 그러나 그 아래 논의 사람이 그들이 잠자는 틈을 타서 그들의 논둑에 구멍을 내어 물을 밑의 자기 논으로 흐르게 했다. 그 두 형제는 이튿날 이 일을 발견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논에 물을 채웠다. 그러나 다음날에도 그들의 논에는 여전히 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니 인내해야겠다고 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이어 칠 일 동안 계속 그렇게 했다. 그렇게 참았으므로 매우 즐겁고 기쁘고 승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날마다 물을 채우고 남이 물을 훔쳐간 것을 허락하면서도 마음속에 평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사역자 형제에게 가서 물었다. “우리는 이미 이레가 넘도록 참았는데도 왠지 여전히 평강이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남이 무엇을 훔쳐도 참고 그냥 두어야 하는데 마음속에는 왜 여전히 평강이 없는지요?” 사역하는 형제는 그들에게, “그렇게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인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형제들은 가서 형제들의 물을 훔친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채우고 그다음에 형제들의 논에 물을 채우십시오. 그러고 나서 속에 평강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두 형제는 좋다고 하고 이튿날 특별히 일찍 일어나 논의 물을 훔친 사람의 논에 먼저 물을 채운 후에 자기들의 논에 물을 채웠다. 이상하게도 논의 물을 훔친 사람의 논에 물을 채우던 그 반나절은 마음속이 갈수록 즐겁고 기뻤다. 그들이 자기들의 논에 물을 다 채운 후에는 마음속의 문제가 해결됐다. 아래 논의 사람이 물을 훔치든 훔치지 않든 마음속이 아주 평안했다. 이렇게 이삼 일이 지났을 때 논의 물을 훔치던 사람은 그 두 형제에게 와서 잘못을 고백하고, “당신들이 믿는 예수님은 참 놀랍습니다. 나도 가서 복음을 들어 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워치만 니 전집, 3집, 56권,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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