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35호
좋은 땅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물
그 땅은 물이 많아서 좋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고 있다. 먹지 않고도 여러 날을 견딜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고는 거의 단 하루도 지낼 수 없다.
원천, 샘, 시내
신명기는 그 땅의 물이 좋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명기에 사용된 서로 다른 용어들에 대해 살펴보자. 하나는 시내로 가득한 땅을 의미하는 ‘시내가 흐르는 땅’이며, 다른 하나는 ‘샘이 솟으며 원천이 있는 땅’(신 8:7)이다. 여러분은 원천과 샘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있는가? 다비(J. N. Darby)가 번역한 성경에는 ‘샘과 깊은 물의 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우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우물에는 언제나 원천이 있다. 밑바닥, 즉 우물 바닥에는 그 우물을 물로 채워 주는 원천이 있게 마련이다. 물은 그 원천으로부터 나와 우물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 우물은 ‘샘’, 즉 ‘깊은 물’이 된다. 그다음에 이 깊은 물로부터 시내가 흘러 나간다. 먼저 원천이 있고, 그다음에 샘인 깊은 물이 있고, 그다음에는 시내가 있다.
원천, 깊은 물, 이러한 여러 종류의 물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은 그분께서 주시는 물은 우리 속에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솟구쳐 오르는 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여러 종류의 물은 그리스도의 생명 공급의 다양한 방면의 예표들이다. 우리의 공급이 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은 여러 가지 종류의 물과 같다. 또한 요한복음 7장에서 주님은 그분을 믿는 사람은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생수이신 그리스도의 생명 공급이다.
우리가 속사람이 메마르고 목마를 때 주님께 와서 그분을 접촉하면 소생된다. 주님을 계속 접촉하면 적셔질 뿐 아니라, 가득 채워지고 물로 충만된다. 그럴 때 형제나 자매를 만나게 되면 즉시, “할렐루야!”라고 외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속에서 흘러나오는 시내이다. 그럴 때 우리는 찬송을 부르며 집회에 올 것이며 생생하게 살아서 올 것이다. 집회에 와서는 즉시 찬양이나 기도를 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바로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시내와 같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원천이 있고, 샘이 있고, 시내가 있다. 원천은 근원이요, 샘은 저장소요, 시내는 흘러나옴이다. 우리에게는 근원이 있고, 저장소가 있고, 흘러나옴이 있다.
좋은 땅에는 하나의 시내가 있을 뿐 아니라 많은 시내나 강이 있다. 또한 많은 원천과 많은 샘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때때로 고통과 시험으로 에워싸여 있을 때 주님을 접촉하면 그분으로부터 무언가를 받는다. 시험 가운데에서 주님을 원천으로, 샘으로, 시내로 체험한다. 이것은 어떠한 원천이며, 어떠한 샘이며, 어떠한 시내인가? 거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가? 때로 주님을 기쁨의 원천으로, 때로는 평강의 원천으로, 때로는 위로의 원천으로 체험한다. 때로는 사랑의 샘으로, 은혜의 샘으로, 빛의 샘으로 주님을 체험한다. 또 다른 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인내의 시내이시요, 겸손의 시내이시요, 관용의 시내이시다.
골짜기와 산
신명기를 볼 때 이 물은 골짜기와 산에서부터 흐르고 있다. 골짜기와 산이 없다면 물은 결코 흐르지 못할 것이다. 모든 땅이 평평하다면 물은 결코 흐르지 못할 것이다. 골짜기와 산은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6장 8절부터 10절까지에서 바울은 대조되는 많은 것들, 즉 많은 산과 골짜기를 언급하고 있다. “영광과 모욕, 악평과 호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혹시키는 사람들 같으나 진실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것 같으나, 보십시오,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것 같으나 죽지 않고, 슬퍼하는 것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것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영광은 산이다. 모욕은 골짜기이다. 악평은 골짜기이며, 호평은 산이다. 슬퍼하는 것은 골짜기요, 항상 기뻐하는 것은 산이다. 가난한 것은 또 하나의 골짜기요,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는 것은 높은 산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미혹시키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미혹시키는 자 같으나 진실했다. 산이 있으면 골짜기가 있는 법이다. 이 구절에는 적어도 아홉 개의 짝, 즉 아홉 개의 골짜기와 아홉 개의 산이 있다. 이것들이 바로 물이 흐를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산과 골짜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즉 생활이 평범하기만 하다면 우리 속에는 아무런 물도 흐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속에는 더욱더 많은 흐름이 있을 것이다. 낮추어지면 질수록, 우리에 대한 악한 말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물은 더욱더 많이 흐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슬픔을 주실 때마다 그다음에는 기쁨이 따라올 것이라고 확신하라. “슬퍼하는 것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것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골짜기요, 산이다.
모든 골짜기는 십자가의 체험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의 체험이다. 또한 모든 산은 주님의 부활의 체험이다. 골짜기는 십자가이다. 산은 부활이다. 우리는 항상 어떤 고통, 즉 골짜기를 체험할 뿐 아니라 언제나 산, 즉 부활을 체험해야 한다. 골짜기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산이 있다. 여러분이 십자가의 죽음을 누릴 때마다 부활도 누릴 것이다. 생수는 이 모든 체험들로부터 흘러나온다. 신명기 8장 7절에 있는 말씀을 더욱 상고해 보자. 그 구절은 시내가 “골짜기와 산에 … 흐르고”라고 되어 있다. ‘산과 골짜기에’라고 하지 않고 ‘골짜기와 산에’라고 말하고 있다. 먼저는 골짜기요, 그다음이 산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흐르는 물을 접촉하는 첫째 장소는 골짜기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시내를 그 시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시내가 산에서부터 솟아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시내는 골짜기에 있지만, 샘은 산에 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을 적시는 물이 여러분 속에서부터 흘러나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골짜기에 있어야 한다. 만일 고통과 시험의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 내보낼 것이 얼마나 많이 있겠는가! 평화롭거나 행복한 때에는 그러한 것을 체험할 수 없다. 그것은 슬픈 날들 속에서, 병든 나날 속에서, 고통의 나날 속에서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때에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면, 사람들을 적실 수 있는 살아 있는 흐름이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모든 죽음의 상황은 소생하게 하는 물을 많이 흘려 내보낼 수 있게 한다.
[위트니스 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4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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