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72호
쓸개즙을 탄 포도주
“그들은 골고다, 곧 ‘해골의 곳’이라는 데에 이르러,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려 마시시게 하려 하였으나, 그분은 맛을 보시고는 마시시려고 하지 않으셨다.”(마 27:33-34)
쓸개즙을 탄 포도주의 용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당시, 사형을 집행하는 이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때 두 가지 일이 발생했다. 첫째로, 군인들이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예수님께 드려 마시시게 하려 하였으나, 그분은 맛을 보시고는 마시시려고 하지 않으셨다’라고 마태는 말한다(27:34). 둘째로, 누가는 주님께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셨다고 말한다(23:34). 쓸개즙을 탄 포도주는 어디에 쓰이는 것인가?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당시 법은 군인들이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가져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에게 그로 하여금 고통을 조금 감소시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 포도주의 효능은 마치 오늘날의 마취제와 같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마시기를 원했지만 주님은 마시지 않으셨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쓸개즙을 탄 포도주가 없음
오늘날 순교한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인은 적다. 많은 이들이 이런저런 고통을 받으면서, 비록 소리를 내지는 않지만 그의 얼굴은 사람들에게 “나는 고통을 받고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받지 않는 것이 더 보기에 좋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지는 십자가는 쓸개즙을 탄 포도주가 있는 십자가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쓸개즙을 탄 포도주 마시기를 거절하셨다. 누가는 우리에게, 그때 주님이 그분을 못 박은 사람을 위해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간구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쓸개즙을 탄 포도주가 없는 십자가이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많은 고통, 각종의 고통을 받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여기서 원망을 품고서, “너희 사람들은 너무도 가증스럽구나! 그날에 내가 반드시 이 일로 너희를 심판하리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들의 태도와 말 속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순교자라는 느낌을 갖게 할 뿐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거절한다는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그가 가정에서 아내에게 질책 받아 마음 아프다 해서, 회사에서 힘써 일했으나 되레 냉대를 받는다고 해서,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에게 가혹한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얼굴에 비친다면, 그는 자신이 순교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되게 십자가를 진다면 고통 받는 느낌이 없다. 쓸개즙을 탄 포도주가 필요한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고통을 받는 느낌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참되게 십자가를 지는 이는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십자가에는 증오나 원망이나 상처받음이나 자기 연민이 없음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도 돌려 대어 때리게’ 하는 것을 단지 행위 그 자체로 본다면, 믿지 않는 사람도 이를 행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문제는 다른 이가 ‘당신의 뺨을 때리거나 당신에게 억지로 길을 가게 하거나 당신의 옷을 가져가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바로 당신 안에 사랑이 있느냐 증오가 있느냐에 있다. 무엇이 십자가인가? 십자가란 증오가 사라지는 곳이다. 증오가 없고 다만 사랑만이 있기 때문에 속에 불평하는 소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핍박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이는 그분 안에 증오가 없고 사랑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쓸개즙을 탄 포도주 마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고통을 받고 있는가? 그렇다. 나는 많은 고통을 받고 있는 아내와 고통을 받고 있는 아버지, 아들 등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고통을 받을 때 몇몇 다른 표현들이 나타남을 보았다. 어떤 이는 그 당시에는 말하지 않지만 뒤에서 원망을 한다(이것이 가장 보편적이다). 당신이 만약 일이 경과된 후에 많은 원망을 갖는다면 이는 바로 당신 안에 고통 받는 느낌이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당신에게는 쓸개즙을 탄 포도주가 필요하며, 당신은 십자가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는 것이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은 소리도 없고 원망도 없지만 운다. 십자가에는 피 흘림은 있지만 눈물 흘리는 것은 없다. 왜 눈물을 흘리는가? 이는 자기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자기 연민이 없으며, 다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있다. 언제든지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당신은 상처 받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고, 언제든지 당신이 상처 받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것이다. 참된 십자가는 마음속에 다만 기도가 있을 뿐 다른 이에 대한 원망이 없으며, 자신을 향한 연민도 없다. 어떤 아내는 나에게 남편이 어떻게 좋지 않은가를 얘기하고 또한 자신이 얼마나 인내하는지를 얘기하지만, 나는 그녀의 모든 인내 속에 오만함이 있지 않을까 두렵다. 육신 안에서 자매인 두 그리스도인이 있었는데, 하루는 언니가 동생에게 잘못을 범하여 동생이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언니가 동생 옆을 지날 때마다 동생은 찬송을 했다. 그것은 “잘 봐라. 너는 실패했고 나에게 죄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나는 이기는 이다.”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언니를 더욱 마음 아프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의 기도이다. 부자연스러운 기도와 가장된 즐거움으로 복수하는 것이다. 무엇이 십자가인가? 십자가는 바로 속에서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원치 않는 것이며, 증오와 분노와 복수가 없는 것이며, 오히려 참된 기도와 축복과 사랑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는 것이 십자가임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기를 연민하며, 화를 잘 내고, 가장된 즐거움으로 사람을 욕한다. 이와 같은 사람은 십자가가 없는 사람이다. 사실상 우리 자신이 지는 십자가라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지시는 십자가가 십자가이다. 어려운 일이 임하거나 어떤 일이 당신을 괴롭힐 때, 몸과 정신이 붕괴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즉시 그 무거운 짐들을 영(spirit)에 두는 것이다. 당신은 그 무거운 짐을 영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몸으로 견딜 수 없고 정신으로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당신의 몸과 정신에 매우 유익하다. 만약 십자가가 아니면 다만 일종의 행위에 속한 노력에 불과하다. 그리고 속에 뿌리를 둔 사랑은 십자가에서 나온 사랑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연합되어 다른 이에게 흘러간다.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수명이 짧은 것은 그들에게 단지 외적인 실행만 있고, 그들이 기독교의 외적인 원칙만 애써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를 억제하는 것에 불과하며, 끝내는 무너지고 만다. 십자가를 깊이 알지 못하면 시련과 고난은 다만 반응과 붕괴를 가져온다. 그러나 십자가의 운행하심 아래에는 다만 사랑이 있을 뿐이다. 못 박혀 죽는 것과 상처 받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당신이 참으로 못 박혀 죽었다면 상처 받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상처 받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그것이 당신을 상하게 하지 못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영(靈)에 속한 사람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더욱 참되게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앙망한다.
(워치만 니, 전집 2집 44권,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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