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

생명나무-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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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나무, 두 근원, 두 노선, 두 원칙, 두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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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흐름 100호

생명나무

 

먹는 것은 중요한 일인데, 이는 먹는 것이 우리 안으로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합당한 음식을 먹는다면 영양분을 받아들일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독 있는 어떤 것을 먹는다면 죽을 것이다. 부모들은 모든 유독한 것들을 자녀들이 보지 못하도록 감추어 두고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한다. 심지어 화학 약품 공장에서조차도 그 약품들이 유독한 것임을 알리는 표시를 하여 주의하게 하며, 어린아이들이 열어 볼 수 없는 특수 용기 안에 있는 그것들을 보관할 것이다. 사람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는 중요하다. 그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다. 먹는 것은 사람에게 중대한 일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에게 어떤 것도 행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직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이 무엇을 먹을 것인지만 관심하셨다. 하나님은 다만 사람에게 잘못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리고 사람의 운명이 어떠할지는 전적으로 그가 무엇을 먹는가에 달려 있었다.

 

생명나무―사람의 음식이신 하나님

창세기 2장에서 우리는 사람 앞에 두 나무―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가 있음을 본다. 생명나무는 (먹음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생명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사람이 먹는 방식으로 그분을 생명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셨다. 먹는 것이 영양분을 유기적으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이다. 유기적인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데는 먹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에게 유기적인 영양분이 된다. 먹는 것이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은 사람에게 유일한 음식이시다. 우리가 먹는 모든 물질적인 음식은 그림자이며 하나님은 우리 음식의 실재이시다(골 2:6-7). (생명나무이신 주님을) 먹음으로써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신진대사적으로 사람의 존재 안으로 동화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 안으로 하나님을 영접할 때, 그분의 새로운 요소가 우리의 어떠함을 대치하며, 우리의 옛 성분은 나가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신진대사이다. 우리의 물질적이고 유기적인 먹음과 신진대사적인 소화와 동화는 우리의 영적 음식이신 예수님을 먹고 소화하고 동화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예시이다. 이것은 단지 우리의 관념이 아니다. 이것은 온 성경 안에 있는 깊은 관념이다.

주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분은 “내가 생명의 떡이니(요 6:35)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57)”라고 말씀하셨다. 생명나무는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2장에서 보여지며 성경의 끝인 요한계시록 2장과 22장에서 보여진다. 이것은 성경 안에 있는 전체적인 관념이, 사람은 하나님을 먹고, 유기적으로 받아들이고, 신진대사적으로 동화시켜 하나님으로 그의 ‘섬유질’, 그의 ‘조성’, 그의 존재가 되게 해야 한다는 것임을 말해 준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결국 우리 존재가 된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동화시켜 온 음식물의 구성체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똑같은 원칙으로 우리의 음식이시다.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주 예수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기는 이에게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성경 전체의 마지막 약속은 생명나무, 곧 생명의 모든 풍성을 지니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에 대한 약속이다.

의지하는 생명

생명나무는 결국 의지하는 생명이 된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람에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상징한다. 사람이 생명나무를 취한다면 그것은 결국 사람 안에서 의지하는 생명이 될 것이다. 극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이, 생명이 항상 의지함을 산출한다는 것을 안다. 생명과 관련된 모든 것은 의지함의 문제이다. 우리는 생명과 관련된 어떤 것에서도 졸업할 수 없다. 먹는 것은 의지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자신이 가장 좋은 음식을 먹었고 충분하게 먹었으므로 더 이상 먹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마시는 문제와 호흡하는 문제 역시 우리가 졸업할 수 없는 의지하는 문제들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는 것이 결국 의지하는 생명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반면에 지식은 결국 독립을 가져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대학에 가서 학위를 얻었다면 그에게는 더 이상 그 대학이 필요하지 않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교수가 알고 있는 바를 알게 될 때, 그는 더 이상 교수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교수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한다면 결코 그에게서 독립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를 지식을 위해 취한다면 우리는 독립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우리의 생명으로 취한다면 독립적일 수 없을 것이고 언제든지 그를 의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식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취하며, 이 신성한 생명은 즉시 우리 안에서 일종의 의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그분은 포도나무이시며 우리는 그 가지들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 안에 거해야 한다(요 15:5). 포도나무에서 떨어질 때 그 가지는 죽게 된다. 이 포도나무의 생명은 결국 모든 가지 안에서 일종의 의지하는 생명이 된다. 모든 가지는 포도나무의 생명을 의지한다. 의지하는 생명은 또한 아브라함이 주님을 따른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히브리서 11장 8절은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름을 받고서 장차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라고 말한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려 주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지도를 주지 않으셨다. 일단 운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에게서 지도를 얻으면, 그는 그 사람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 그에게 지도가 있으므로 지도를 준 사람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우리에게 지도 대신에 그 자신, 곧 그의 임재를 준다면 우리는 결코 그에게서 독립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를 의지하면서 그를 우리의 지도로 삼아야 한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실지 상황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여행을 위한 지도로 여기면서, 그분의 즉각적인 인도를 받기 위해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을 신뢰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으며(행 7:2), 그러한 나타남이 아브라함에게 안에서 의지하는 생명을 살게 했다. 이렇게 생명나무를 우리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를 언제든지 그러한 생명, 곧 생명나무의 생명을 의지하게 한다. 우리는 생명나무의 의지하는 생명을 살아야 하며,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게 하는 선과 악의 지식나무는 거절해야 한다.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나무는 사실상 성경 육십육 권에 걸쳐 통제하는 두 노선이다.

[위트니스 리, 생명에 대한 기본공과,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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