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4)―믿는 이들에게 새 예루살렘을 적용함
새 예루살렘의 그림과 생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금으로 된 산이며, 벽옥으로 건축된 성벽이 이 산을 둘러싸고 있다. 그 성 자체는 ‘네모반듯하고’(계 21:16)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모두 같다. 성벽의 밑에는 성벽의 기초인 열두 층의 보석이 있다. 성벽 사면의 각 면에는 세 개의 진주 문이 있다. 성의 꼭대기에는 한 보좌가 있는데, 이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이다. 어린양은 성의 등이시며, 하나님은 어린양 안에 빛으로 계신다. 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며, 이 강은 나선형으로 산을 내려오는 금으로 된 길 가운데로 흐른다. 강 양쪽에는 생명나무가 자라는데, 이 나무는 생명수의 흐름을 따라 퍼지고 뻗어 나가는 덩굴나무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받아들이고 누리도록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는다. 이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생활을 볼 필요가 있다. 그 성의 생활 또한 삼일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생명의 근원이심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키는데, 그분은 어린양 안에 빛으로 계시며 또한 생명의 근원이시다(요 5:26). 생명수의 강이 보좌에서 흘러나온다. 요한복음 7장 38절과 39절은 생명수의 강이 생명의 영을 의미함을 가리킨다. 이 강 안에서 생명나무가 자라는데, 생명나무는 아들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의 삼일의 생활, 즉 아버지께서 근원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신 것과, 그 영께서 아버지에게서 하나의 강으로서 흘러나오시는 것과, 아들께서 생명나무로서 그 영 안에서 자라심으로 성 전체의 생명 공급을 위해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는 것을 본다. 사실상 그 성의 생활은 삼일 하나님의 생활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삶
우리는 보좌 위에 계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은 어린양–하나님, 즉 구속하시는 하나님 또는 구속자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그분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서 우리는 구속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은 그 보좌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라고 말한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어린양은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녹색’의 벽옥 하나님께서 ‘붉은’ 홍보석 어린양 안에 계신다(계 4:3). 구속하시는 이 하나님께서 생명의 근원이시다. 우리 모두는 이 놀라운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여기에 높이가 만 이천 스타디온 혹은 약 이천이백 킬로미터인, 금으로 된 산이 있다. 이 높은 산의 꼭대기에는 보좌가 하나 있고, 이 보좌에 하나님과 사람 둘 다이신 분 곧 구속하시는 하나님께서 앉아 계신다. 그분께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근원이시다. 이 근원으로부터 생수이신 그 영께서 흘러나오시어 성 전체에 두루 흐르신다. 오늘날 우리는 보좌 위에 계시는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함께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을 바로 우리의 근원과 권위로 취해야 한다. 우리는 ‘보좌를 제쳐 놓고는’ 생명의 흐름을 누릴 수 없음을 보았다. 우리는 흐르는 생명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보좌를 받아들이고 보좌 아래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구속하는 요소와 신성한 권위의 요소를 가지신 하나님을 우리의 근원으로 취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생명의 흐름을 갖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그분의 본질의 본성인 사랑으로, 그분의 표현의 본성인 빛으로 취하는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의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있는 것이다(요일 1:2-3). 우리는 반드시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머물면서 우리 자신을 그 안에 두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날마다 따로 일정한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아들 하나님과 함께 삶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체현이신 아들(골 2:9)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여러분에게 아버지가 있을 때 아들도 있고, 여러분에게 아들이 있을 때 아버지도 있다(요일 2:23-24). 하나님의 체현이신 아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골 3:4).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생명이신 아들과 함께 산다. 신약은 아버지를 생명이시라고 말하지 않고 항상 아들을 생명이시라고 말한다(골 3:4, 요 14:6). 물론 생명은 근원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흐름이 원천으로부터 나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원천이신 아버지와 함께 살며, 생명나무 즉 생명과 생명 공급이신 아들과 함께 산다(계 22:2, 2:7). 요한계시록 2장 7절에서 지적한 것같이, 오늘날에도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다. 주 예수님은 매일 우리의 생명 공급이시며, 우리는 날마다 이 공급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그분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롬 10:12). 매일매일 우리는 거듭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오, 주님!”이라고 부를 때에도 매우 좋지만, 이것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를 때만큼 달콤하지 않다. 때로 우리가 많은 것을 위해 기도할 때 주님을 우리의 생명과 생명 공급으로 누리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와 그분의 사랑스러운 이름을 부르면서 그분의 존재와 그분께서 이루신 일들로 인해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경배한다면, 그분에 대한 우리의 누림과 그분과의 교통은 매우 풍성할 것이다.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삶
우리는 또한 아들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신 그 영(요 14:17상, 15:26, 16:13-15)과 함께 삼일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우리는 “오,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 주님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을 누리는 즉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은 그 영으로 실재화되신다. 주님을 부를수록, 우리는 더욱더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신 그 영 곧 실재의 영을 우리 안에 갖게 된다. 실재란 주로 삼일 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을 지닌 존재 자체를 가리킨다. 그 영께서 바로 삼일 하나님의 실재이시다. 이 영은 또한 생명의 영이시다(롬 8:2). 아버지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아들은 생명이시며 그 영은 생명의 영이시다. 발전소는 전기의 근원이고, 전기 자체는 전기이다. 그러나 전기가 우리에게 적용되려면 전기의 흐름 곧 전류가 필요하다. 전류는 사실상 전기 자체이지만, 전기가 움직이지 않으면 적용될 수 없다. 전기는 오직 전류에 의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 전류는 전기의 흐름이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발전소이시고, 아들은 전기이시며, 그 영은 전류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을 언급한 고린도후서 13장 14절과 일치한다. 그 영의 교통은 그 영의 흐름이다. 우리는 그 영과 함께 살 때 생명의 흐름을 누리고, 이 생명은 우리의 참된 공급이 된다.
우리의 생활은 삼일의 생활, 즉 우리가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고, 아들의 확대를 위하여 아들과 함께 살며, 삼일 하나님의 넘치는 공급을 얻기 위하여 그 영과 함께 사는 생활이어야 한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보좌에 계시는 아버지와, 생명수의 강으로서 흐르시는 그 영과, 생명나무로서 자라시는 아들로 말미암아 산다. 자라시는 아들은 생명 공급이시고, 흐르시는 그 영은 성 전체를 유지하기 위한 삼일 하나님의 넘치는 공급이시다. 이것은 다만 장래의 어떤 것이어서는 안 되고 오늘 우리의 생활이어야 한다. 우리는 근원이시고 사랑이시며 빛이신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살고 있다. 또한 삼일 하나님의 체현이시고 생명이시고 생명 공급이신 아들과 함께 아들의 확대를 위해 살고 있다. 또한 교회생활 전체를 보양하는 삼일 하나님의 넘치는 공급을 얻기 위해, 누릴 만한 그리스도의 실재화이신 그 영, 곧 생명의 영이시자 생명수이신 그 영과 함께 살고 있다. 우리의 생활은 이러한 삼일의 생활이어야 한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신약 경륜,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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