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127호
새 예루살렘(5)
믿는 이들에게 적용함-삼일의 표현
요한계시록 21장에 계시된 새 예루살렘에서 그 성은 진주 문과 열두 층의 보석으로 건축된 벽옥의 성벽이 있는, 금으로 된 산이다. 금은 신성한 본성을 지니신 아버지 하나님을 표현하고, 진주는 죽음과 부활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며, 보석은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으로 변화시키는 일을 하시는 그 영을 표현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삼일의 표현, 곧 모든 신성한 풍성의 근원이신 아버지와 모든 신성한 풍성의 체현이신 아들과 모든 신성한 풍성의 실재화이신 그 영을 본다.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표현
모든 신성한 풍성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표현은 금으로 상징된 그분의 본성에 근거한다(계 21:18하). 새 예루살렘 전체의 기반은 금이다. 왜냐하면 성 자체가 금으로 된 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이 그 성의 기반과 터와 부지이다. 아버지의 삼일의 표현은 그분의 본성에 근거할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영광 안에 있다(계 21:11). 하나님 자신이 성의 빛이시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에는 천연적이거나 인공적인 어떤 빛도 필요없다.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이 이상은 우리의 실지적인 생활에서 오늘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그 성 자체가 금이며(21:18) 성의 길은 투명한 유리와 같은 순금(21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에서 금으로 된 산이 우리의 길 또는 도로가 됨을 뜻한다. 순수하고 투명한 신성한 금이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걷는 길이 되어야 한다. 교회생활 안에서도 반드시 순수하고 투명하며 솔직하고 곧으며 열려 있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금의 본성이 우리가 걷는 길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 안에서 걷고 행동하고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빛이 우리 안에서부터 비출 것인데, 이 빛 비춤이 곧 그분의 영광이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집에 올 때, 그들은 영광이 거기에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과 가정생활과 직장 생활과 교회생활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신성한 금과 빛나는 신성한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정치적’으로 처신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의 공손함은 사실상 정치적인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처신하고 걸으며 생활하고 있는가?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 신성한 본성 안에서 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상대방의 등 뒤에서는 물어 뜯는 말을 하면서도 서로의 앞에서는 공손하게 행동하는 ‘험담꾼들’이다. 이런 종류의 품행은 새 예루살렘에 속한, 금으로 된 길이 아니다.
아들 그리스도의 표현
삼일의 표현의 두 번째 방면은 모든 신성한 풍성의 체현이신 아들의 표현이다. 근원의 모든 어떠함과 근원이 소유한 모든 것은 아들 안에 체현되어 있다. 모든 신성한 풍성의 체현이신 아들의 이 삼일의 표현은 그분의 인격 안에 있고, 그분의 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구속하시는 인격이시며, 인격이신 이 구속자는 등(Lamp)이시다(21:23). 등이신 어린양은 전적으로 표현을 위해 존재하신다. 모든 전구는 그 안에 담긴 빛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 전체가 등이신 그리스도라는 이 인격의 표현 아래 있다. 등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약 이천이백 킬로미터인 성을 비출 수 있는 큰 전구와 같다. 아버지 하나님은 금이시며 또한 빛이시지만, 이 빛은 등이 필요하다. 적합한 등이나 전구가 없다면, 전기에서 나오는 빛은 밝게 비추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곧 어린양께서 등이 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비추시는 방식으로 빛나실 수 없을 것이다. 등 안에는 빛을 비추시고 삼일 하나님을 표현하시는 아들의 인격이 있으나, 진주들(계 21:21) 안에는 아들의 죽음과 부활의 일이 있다. 우리는 진주가 죽음의 물속에서 조개에 의해 산출된다는 것을 보았다. 조개가 모래알로 상처를 받을 때, 그 모래알 주위에 자신의 생명 즙을 분비하여 그것을 귀한 진주로 만든다. 조개의 상처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고, 조개의 생명 분비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분비를 상징한다. 그분의 인격은 등 안에 있으며, 그분의 일은 진주 안에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이제는 더 이상 그가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사신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의해 살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 전적으로 살고자 할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는 등으로서 계신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이다. 한 부부가 그리스도를 따라 살지 않고 그들 자신을 따라 산다면, 자주 말다툼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기꺼이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선포한다면, 등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결혼 생활 안에서 빛을 비추고 계실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상처 곧 죽음 안에 머문다. 동시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표현을 위해 그분의 부활 생명을 우리 주위에 분비하심으로 우리를 진주로 만드신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일로 그분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영의 표현
모든 신성한 풍성의 실재화이신 그 영에 의한 삼일의 표현은 삼일 하나님의 완결이신 그분의 모든 것을 포함하심에 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의 강이 있다. 삼일 하나님은 이 강 안에서 우리에게 도달하시고, 이러한 삼일 하나님의 도달하심이 곧 모든 신성한 풍성의 실재화이다. 이 도달하는 강은 아버지의 온 존재와 모든 소유, 그리고 아들의 온 존재와 모든 소유를 우리에게 매우 실지적으로 실재가 되게 한다. 모든 신성한 풍성의 실재화이신 그 영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가 이 강 안에 있고, 이 강은 신성한 본성인 금으로 된 길 안에서 흐르며, 이 강 안에 그리고 그 강둑을 따라 생명나무가 있다(계 22:2). 하나님, 어린양, 보좌, 신성한 길인 신성한 본성,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가지신 그리스도가 모두 이 흐름에 둘러싸여 계신다. 이 흐름이 없다면 우리는 보좌를 만질 수 없을 것이고, 신성한 본성을 누릴 수 없을 것이며, 생명나무 곧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가지신 풍성하신 그리스도께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흐름이 우리에게 올 때, 놀랍고도 신성한 이 모든 항목이 함께 온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반드시 그 영 안에 있는, 그 영에 의한, 그 영과 함께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과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에는 반드시 우리의 누림을 위해 하나님, 어린양, 보좌, 신성한 길인 신성한 본성, 측량할 수 없는 모든 풍성을 가지신 그리스도를 가져오는 흐르는 강이 항상 있어야 한다. 아내의 복종이 그 영이어야 하며, 남편의 사랑이 그 영이어야 한다. 우리의 미덕의 각 방면이 다 그 영이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과 23절에 있는 그 영의 열매가 바로 우리의 미덕이 되신 그리스도의 특징들이다. 이 미덕들은 그 영의 모든 것을 포함한 흐름으로부터 산출되는 그 영의 열매이다.
오늘날의 교회생활
오늘날의 교회생활은 반드시 새 예루살렘의 축소판이며 미리 보여주는것(precursor)이어야 한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고 삼일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삼일 하나님으로 조성되고 있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날마다 우리는 삼일 하나님을 누려야 한다. 그럴 때 자연스럽게 삼일 하나님을 표현한다. 이것이 우리의 현재의 체험이어야 하며, 또한 이것이 영원 안에서 우리의 장래의 운명일 것이다.
[위트니스 리, 하나님의 신약 경륜,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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