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통(3)-서머나 교회

교회의 정통(2)-에베소 교회
September 16, 2024
교회의 정통(4)-버가모 교회(1)
November 8, 2024

생명의 흐름-130호 

교회의 정통(3)-서머나 교회

성경: 계 2:8-11  

계속해서 두 번째 교회, 곧 서머나 교회를 보기로 하자. 교회 역사에서 사도 시대와 바로 이어지는 사도 시대 이후 교회에 큰 박해가 있었다. 고난을 받는 것은 교회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있는 교회의 이름은 ‘서머나(Smyrna)’이다. 서머나는 ‘몰약(myrrh)’이라는 단어에서 나온 말로서 ‘고난’이라는 뜻 있으며, 박해받는 교회를 대표한다.

죽음을 통과한 교회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가 이렇게 말한다.”(계 2:8하) 이 서신은 주 예수님의 이름이 특별하고, 이기는 이가 받는 보상도 특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주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언급하실 때 ‘처음과 마지막이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8절)라고 하셨다. 또 주님은 이기는 이에게 “결코 둘째 죽음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11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생명이 죽음을 이기는 것을 증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만을 볼 뿐, ‘영원토록 살아 있으며’(1:18)와 ‘다시 살아난’(2:8)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큰 문제인가? 오순절 때에 사도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에 붙잡혀 계실 수 없으셨기 때문입니다.”(행 2:24)라고 말했다. 죽음은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죽음에 들어가면 나올 수 없으나, 주 예수님은 죽음이 그분을 붙잡아 둘 수 없었다는 것이다. 죽음은 그분을 붙잡아 둘 힘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그분의 생명은 죽음을 견디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 안에 있는 부활의 원칙은 매우 귀하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그 생명이 죽음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가 죽음을 견딜 수 있다고 보신다. 음부의 문이 교회를 향해 열려 있지만, 그 음부의 문은 교회를 이기지 못하고 교회를 그 안에 가두어 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부활이다. 언제든지 교회가 고난을 이기는 힘을 잃으면, 교회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만나면 죽음을 만난듯이 끝나고 만다. 그러나 부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고난은 사람이 죽음을 견딜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여러분은 어떤 형제가 그러한 일을 당하면 끝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그 일을 통과하고 다시 나온다. 죽음을 거쳐 능히 존재하는 이것이 곧 부활이다. 우리의 개인 생활도 많은 때 이와 같다. 때로 시련이 오고 시험이 오면, 기도도 할 수 없고 성경을 보는 것도 힘들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우리는 다시 일어서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서 나오게 된다. 교회의 한 가지 기본 원칙은 죽음을 통과할 수 있고 결코 매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비방 

  “또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이들의 비방도 나는 안다.”(계 2:9) 여기에서 우리가 다시 주의해야 할 것은 유대인의 문제이다. 주님은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 환난과 가난은 그래도 쉽게 이길 수 있지만 내부에서 오는 것은 대처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말하는 유대인은 세상에 있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주님은 여기에서 그들이 유대인에게 해(害)를 입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받은 고난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유대교이고 무엇이 교회인지를 알아야 한다. 유대교와 교회 사이에는 여러 가지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는 반드시 주의해야 할 네 가지를 언급하고 싶다. 첫째는 성전이고, 둘째는 율법이고, 셋째는 제사장이고, 넷째는 약속이다.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반드시 성전에 가서 섬겨야 한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제물을 드릴 필요가 있으면 반드시 성전에 가서 제물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셨다고 느껴서 그 은혜에 감사를 드리려고 할 때도 역시 성전에 가서 감사를 드려야 한다. 성전에 가야만 비로소 하나님께 경배드릴 수 있다. 유대인은 경배하는 사람이며, 성전은 그들이 경배하는 곳이다. 경배하는 사람과 경배하는 곳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어떠한가? 우리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교회의 특징은 장소도 없고 성전도 없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 21절과 22절을 보자. “그분 안에서 건축물 전체가 함께 연결되어 주님 안에 있는 성전으로 자라 가고 있으며, 그분 안에서 여러분 또한 영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로 함께 건축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우리 각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단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축하시고 연결하시어 하나님의 거처가 되게 하신다. 교회의 경배 장소는 바로 경배하는 사람들 자신이다. 유대교의 성전은 물질적인 성전이지만, 교회의 성전은 영적인 성전이다. 

   유대인에게는 또 생활의 규례, 곧 율법이 있다. 유대인은 누구나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십계명을 잘 지킬지라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주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눅 18:20-22). 유대교에 있는 생활 원칙의 표준은 돌판에 새겨져 있으며 외워야 하는 것이다. 유대교의 생활의 표준은 죽은 것이며 밖에 있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율법이 없다. 교회 안의 율법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돌판에 새긴 것이 아니고 오직 마음 판에 새긴 것이다.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곧 우리의 법이시다. 하나님께서 “나는 내 법들을 그들의 생각 안에 넣어 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것들을 새길 것이다.”(히 8:10)라고 말씀하셨다(참조 렘 31:33).

   유대교 안에는 경배하는 사람과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 그 거리가 곧 유대교이다. 그러면 유대교인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가? 그들은 중간 계급의 사람, 곧 제사장을 의지해야 한다. 제사장이 그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그들 자신은 세상에 속한 사람이므로 다만 세상에 속한 일만 할 수 있으며 세상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제사장은 어떠한가? 제사장은 완전히 영에 속하여 영적인 일만 처리한다. 결국 유대인의 책임은 소와 양을 끌고 성전에 가는 것이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는 제사장의 일이지 유대인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중간 계급은 이미 없어졌다. 그러면 무엇이 유대인의 비방하는 말인가? 그것은 서머나 교회 안에 있는 일부의 사람들이 “만일 무엇이든지 다 형제에게 하라고 하여, 침례를 주는 것도 형제가 하고 떡을 떼는 것도 형제가 한다면 전혀 질서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큰일 날 일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중간 계급을 세우기 원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미 유대교화되었다. 유대교에는 제사장들이 있지만, 기독교에는 엄격한 신부들과 그다지 엄격하지 않은 성직자들과 그리고 목사 제도 안에 있는 보통의 목사들이 있다. 신부와 성직자와 목사가 모든 영적인 일을 도맡아서 하며 교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헌금뿐이다. 평신도는 세상에 속한 사람이며 세상일만 할 수 있고 세상을 마음대로 따를 수 있다. 교회의 영적인 일을 몇 사람만이 도맡아 하게 될 때 교회가 이미 타락한 것이다. 교회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온몸을 드릴 것을 요구한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계속해서 네 번째 차이점을 보기로 하자. 유대인이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은 밭에서 밀을 더 많이 수확하려는 것이고, 야곱의 경우처럼 소와 양이 낙태하지 않고 많이 번성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세상에 속한 축복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은 다 세상에 속한 약속이며, 이 세상 국가 중에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첫 번째 약속은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어떤 때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를 믿으면 밥을 줍니까?”라고 묻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나는 “예수님을 믿으면 밥그릇이 깨집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교회이다. 교회의 가르침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더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더 잃는 것이다. 교회는 고난을 고통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도리어 기쁨으로 여긴다. 오늘날 이 네 가지 항목(물질적인 성전, 외적인 율법, 중간 계급인 제사장, 세상에 속한 약속)이 교회 안에 있지 않은가? 주님은 여기에서 한마디의 매우 강한 말씀을 하셨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회당에 속한 사람들이다.”(계 2:9하) 

   서머나 교회에는 환난과 가난과 유대인의 비방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너는 장차 당할 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다(계 2:10상). [워치만 니, 교회의 정통, 한국복음서원] 

연락처: 707—440—3412

이메일: HighPeakTruth12@gmail.com
홈페이지: HighPeakTruth.org 에서 지난 메시지들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유튜브 채널: youtube.com/@highpeaktruth/videos

본 내용의 PDF 형식 파일을 다운로드 받으시려면 클릭하세요.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