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134호] 교회의 정통(6)―사데 교회
성경:계 3:1-6
‘사데’는 ‘남은 이’라는 뜻이다. 사데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다. 전 세계에 걸쳐서 교회들 안에 있었던 부흥의 일은 다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하나님의 반응이 곧 사람에게는 회복이다. 주님께서 두아디라의 상황을 보셨으므로 사데가 나타난 것이다. 사데는 두아디라에서 회복되어 나쁜 것이 좋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는 것이 사데이다. 사데는 종교 개혁 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종교 개혁 이후의 교회 역사를 포함한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지 않음
“내가 너의 일을 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다.”(계 3:1하)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은 실로 위대한 일이며 하나님의 반응이었다. 하나님은 확실히 루터를 출구로 삼으셨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이었다. 루터가 처음 시작했을 때, 종교 개혁은 전적으로 사데였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회복을 위한 것이었다. 주님은 루터의 일이 나쁘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계 3:2). 좋기는 하지만 충분히 좋은 것은 아니었다. 주님의 눈에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것을 요구하신다. 루터 이후에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안을 얻게 된다. 루터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알려 주었을 뿐 아니라 공개된 성경을 주었다. 두아디라에서는 권위가 이세벨의 수중에, 즉 교회의 수중에 있다. 문제는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라고 하지 않고 “교회가 이렇게 말한다.”라고 하는 데 있다. 모든 문제를 어머니 교회(the mother church)에서 정한 것이라고 말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사람은 모두 어머니 교회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루터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면, 로마 가톨릭교회가 어떻게 말하는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그 사람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열리자 모든 교회가 빛 비춤을 얻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개신교가 우리에게 합당한 교회를 보여 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와 공개된 성경은 가는 곳마다 국교회를 세웠을 뿐이다. 루터교는 많은 나라에 국교회를 세웠다. 나중에 영국에서도 성공회(Anglican Church)가 생기게 되었는데, 이것 역시 국교회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부터 교회의 본성이 변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공개된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개신교는 여전히 교회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지 못했다. 종교 개혁 당시에도 교회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루터는 교회를 개혁한 것이 아니다. 루터 자신도 일찍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그치지 말고 더 많은 것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믿음은 처음 상태로 돌아갔으나 교회는 전혀 바뀌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로마 가톨릭교회가 이제는 영국의 국교회로 변하고 독일의 국교회로 변했을 뿐이다. 종교 개혁은 교회를 초대 교회의 상태로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라 다만 로마 가톨릭교회를 국교회로 변하게 했을 뿐이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음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다.” 종교 개혁은 살아 있는 것이었지만 많은 것들이 여전히 죽어 있었다. “깨어 있어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죽어 가고 있는 것들을 견고하게 하여라. 왜냐하면 나는 너의 일이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하여, 그것을 지키고 회개하여라.”(계 3:2-3상) “깨어 있어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기는 하지만 죽어 가고 있는 것들을 견고하게 하여라.”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공개된 성경과 그것들로부터 얻은 생명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사데의 전체 역사에서 이러한 것들이 죽어 가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죽어 가고 있는 것들을 견고하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서는 이미 성경이 공개되어 있지만 여전히 사람의 규정이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왜냐하면 나는 너의 일이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조차도 완전하지 않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은 완전하지 않은데, 그것들은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하여, 그것을 지키고 회개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개신교의 역사는 부흥의 역사이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루터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부흥된 것은 하나의 커다란 회복이다. 개신교의 한 가지 큰 특징은 ‘회복’이다. 우리는 성령께서 어디까지 일하실지 알지 못한다.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하자 루터교가 생겨났다. 장로에 대한 진리를 보자 장로교가 조직되었다. 웨슬리가 나타나자 감리교가 설립되었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교파가 있으며, 1914년에 이미 천오백여 개가 있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사데가 종종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이 있을 때, 사람은 하나의 조직을 만들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담으려고 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담을 수 있는 축복이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개신교는 하나의 잔과 같다. 부흥의 초기에 사람들은 생수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으로 가고자 했다. 또한 하나님의 영께서 운행하시는 곳이라면 그곳으로 가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생수를 잃지 않고 담아 두려고 잔을 이용했다. 이렇게 하는 것의 장점은 은혜를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오직 이 잔에만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세대 때에는 이 잔이 가득 차 있었다. 두 번째 세대 때에는 반만 남아 있었다. 세 번째, 다섯 번째 세대에 이르러서는 물이 다 없어지고 빈 잔만 남았다. 그 후 그들은 모든 잔이 무언가 마실 만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구의 잔이 더 좋은가로 다른 교파와 다투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하나님은 또 다른 반응을 하시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또 다른 사데인 것이다. 부흥의 역사는 모두 이와 같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사람들은 그 은혜를 지키려고 하나의 조직을 세운다. 결국 그 조직은 존재하게 되지만 그 내용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 잔은 깨지지 않는다. 열정적인 사람들이 그 잔을 계속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원칙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웨슬리의 제자가 영원히 웨슬리를 넘어서지 못하며 칼뱅의 제자도 영원히 칼뱅을 넘어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지자 학교에서는 선지자를 배출하지 못한다. 큰 선지자는 모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그분께서 원하시는 사람에게 임하신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지 우리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생수의 귀함을 생각하여 하나의 조직을 세워서 그것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러나 세대가 지날수록 앞 세대에 못 미치게 되어 결국 말라 버리는 데 이르게 된다. 다 말라 버리고 나면 하나님은 또 다른 광야에서 다시 생수를 주신다. 개신교의 모든 역사는 사데로 대표된다. 부흥된 후에 다시 부흥되어야 한다. 한 면에서 부흥이 있음으로 인하여 주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다른 한 면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책망을 받아야 한다. 개신교에는 지속적으로 부흥이 있지만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완전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있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문제는 지금 어떻게 받고 듣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어떻게 받고 들었느냐에 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기억하여, 그것을 지키고 회개하여라.”(계 3:3상)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갈 것인데,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네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계 3:3하). 도둑은 와서 값싼 것을 훔쳐 가지 않고 언제나 가장 좋은 것만 훔쳐 간다. 주님도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것을 훔쳐 가신다. 우리가 집에 있어도 하나는 데려가질 것이고 하나는 남겨질 것이다(마 24:41). 주님께서 우리를 ‘훔쳐’ 가실 정도로 우리가 귀중하게 되기를 바란다. [워치만 니, 교회의 정통,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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