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137호
교회의 정통(9)-라오디게아 교회
성경: 계 3:14-22
이제 마지막 교회에 대해 볼 것이다. 두아디라는 완전히 실패했다. 사데는 두아디라보다 조금 좋았지만, 주님은 여전히 책망하셨다. 오직 빌라델비아에만 책망이 전혀 없었다. 주님의 약속은 빌라델비아에 있었다. 만일 이 서신이 우리 사람이 쓴 것이라면 빌라델비아까지 쓰고 더 이상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일곱 교회 가운데서 교회의 상태를 예언하고 계셨으므로 우리에게 라오디게아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가실 필요가 있으셨다. 라오디게아도 다른 교회들처럼 그 이름이 매우 특별하다. 그것은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라오스(laos)’는 ‘일반 사람’ 혹은 ‘평신도’라는 뜻이고, ‘디케이아(dicea)’는 ‘관습’ 혹은 ‘의견’으로 번역된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는 ‘일반 사람의 관습’ 혹은 ‘일반 사람의 의견’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교회가 이미 실패하여 이제는 일반 사람의 의견이나 관습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에서 우리는 ‘형제들’과 ‘서로 사랑함’을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일반 사람’과 ‘의견이나 관습’을 본다. 하나님의 자녀가 빌라델비아의 위치에 서 있지 않으면 넘어지고 실패할 것이고, 사데로 돌아갈 수도 없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형제들’의 진리를 본 사람은 심지어 그가 원한다 할지라도 개신교로 돌아갈 수 없다. 빌라델비아에 굳게 서 있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빌라델비아에서 라오디게아로 퇴보하는 수밖에 없다. 일찍이 빌라델비아의 달콤한 맛을 보았으나 지금은 하락한 것이 라오디게아이다.
미지근함
“내가 너의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거나 뜨겁기를 원한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나의 입에서 토하여 낼 것이다.”(계 3:15-16) 사데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는 것이고, 라오디게아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것이다. 에베소에 대해서는 “너의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옮길 것이다.”라고 하셨고, 라오디게아에 대해서는 “너를 나의 입에서 토하여 낼 것이다.”라고 하셨다. 주님은 더 이상 그들을 쓰지 않으실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데 있다. 지식은 충만하나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이 뜨거울 때는 빌라델비아였으나 지금은 이전에 비해 식었다. 빌라델비아가 하락하면 라오디게아가 된다.
영적 교만
“네가 ‘나는 풍부하고 풍성하게 되어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만”(계 3:17상). 앞에서 우리는 ‘형제들’의 운동이 종교 개혁에 비해 더 위대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종교 개혁은 단지 양적인 개혁이었으나, ‘형제들’의 운동은 질적인 개혁으로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한 것이었다. 그 능력은 실로 위대했다. 이 ‘형제들’은 행위 면에서나 진리 면에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강했다. 그들 가운데 있는 요리사조차도 개신교의 선교사보다 진리를 더 잘 알고 있을 정도였는데, 그들은 결국에는 교만에 떨어졌다. “여러분은 다 못하지만 우리는 다 할 수 있다.”라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개신교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유명한 스코필드(Scofield)도 ‘형제들’ 가운데 가서 배웠다. 전 세계의 일꾼, 학생, 전도자와 성도가 다 그들에게서 도움을 얻고 빛을 얻었다. 그들의 책을 통해 도움을 얻은 사람은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전 세계에서 ‘형제들’처럼 성경을 가르친 곳이 없었다. 결국 ‘형제들’에게 교만이 생기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의 학생은 모두 다른 사람의 선생이다.”라고 말했다. 라오디게아의 특징은 영적 교만이다. 그들은 지식만 있고 생명은 없으며 스스로 만족하고 자고해진 사람들이다.
주님의 세 가지 권면
“그래서 나는 너에게 권면한다. 불에 제련한 금을 나에게서 사서 풍성하게 되도록 하고, 흰옷을 사서 입음으로 너의 벌거벗은 수치가 보이지 않도록 하며, 안약을 사서 너의 눈에 발라서 보도록 하여라.”(계 3:18) 그들은 교리 면에서는 풍성하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여전히 가난하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살아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들의 실패와 약함은 믿음이 없는 데서 기인한다. 베드로는 불에 제련한 금이 바로 시련을 거친 믿음이라고 말했다(벧전 1:7). 말씀이 부족할 때 여러분은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말씀이 풍성해지려면 들은 말씀과 연합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여러분이 들은 말씀이 실제로 유용해지려면 여러분은 여러 가지 시련을 거쳐야 한다. 즉, 불에 제련한 금을 사야 한다.
주님은 또 “흰옷을 사서 입음으로 너의 벌거벗은 수치가 보이지 않도록 하며”(계 3:18중)라고 말씀하셨다. ‘흰옷’은 행위를 가리킨다. 주님은 우리가 오직 깨끗한 동기와 깨끗한 목적을 갖고 주님을 위해 일하기를 원하신다. 많은 활동과 동기를 접촉할 때 그 안에 많은 더러움이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희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또한 “안약을 사서 너의 눈에 발라서 보도록 하여라.”(계 3:18하)라고 말씀하셨다. 연고를 사서 눈에 바르는 것은 성령의 계시이다. 성령의 계시가 있어야 비로소 보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교리를 너무 잘 아는 것이 성령의 계시를 줄어들게 할 수 있다. 많은 때 교리는 생각에서 생각으로 전해지지만, 영적인 눈은 보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빛 안에서 행하고 있다. 영적인 일은 여러분이 많이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접촉함으로써 되는 것이다. 많은 때 교리와 지식이 증가했을 뿐 하나님 앞에서 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배워야 하는 한 가지는 바로 안약을 사는 것이다. 직접 보는 것만이 참으로 보는 것이다. 보는 것은 이미 얻은 것의 근거이자 다시 보는 것의 근거이다.
교회의 문밖에 계신 주님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계 3:20) 이 문은 무슨 문인가? 이 말씀은 주님께서 죄인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이 문은 교회의 마음 문이다. 주님께서 교회 문밖에 계시다니, 도대체 이 교회는 어떤 교회란 말인가! 성경의 진리에는 두 노선이 있다. 하나는 성령의 노선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노선이며, 하나는 주관적인 면이고 다른 하나는 객관적인 면이며, 하나는 체험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에 관한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객관적인 진리를 지나치게 중시한다면, 그는 구름에 올라타려는 사람처럼 실지적이지 않은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항상 주관적인 면에 서서 내적인 성령의 일만 중시한다면, 그는 늘 자기 속을 들여다보며 불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추구하는 사람은 다 진리의 두 방면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형제회의 가장 큰 실패는 객관적인 진리를 너무 중시하고 주관적인 진리를 경시한 데 있다.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 이 말씀은 객관적인 것이 주관적인 것으로 변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너의 모든 객관적인 것을 주관적인 것으로 변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주님은 여기에서, 만일 네가 문을 열면 내가 너와 함께 먹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기는 이에 대한 약속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이기고 나서 나의 아버지의 보좌에 아버지와 함께 앉은 것과 같이, 나의 보좌에 나와 함께 앉도록 해 주겠다.”(계 3:21) 많은 사람들이 일곱 교회의 이기는 이에 대한 약속 중에서 이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 이기는 이에 대한 매우 높은 약속이 있다. 왜 그런가? 교회는 여기에 와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기는 이는 여기에서 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여기에 보좌가 있는 것이다. [워치만 니, 교회의 정통,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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