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138호
교회의 정통(10)-결론
성경에는 구약의 유다와 이방 나라에 관한 예언 외에 신약에서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관한 예언도 있다. 교회에 관한 예언은 어디에 있는가? 신약의 처음 일곱 서신서들(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에는 예언이 없다. 그러나 나중의 일곱 서신인 요한계시록 2장과 3장만이 우리에게 교회에 관한 예언을 보여 준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하나씩 간략하게 이야기하였고, 그것이 말씀대로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보았다.
주님을 얼마나 아는가
각 서신에서 주님은 그분 자신이 누구이시고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이기는 이에게는 무엇을 주시는지를 보여 주셨고,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한 가지는 이것이다. 즉,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교회에 어떤 문제가 생겼든지 간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신실하다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 주신다. 주님은 그분 자신이 길이요, 실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그러므로 어떤 서신에서든지 주님은 우리에게 교회의 상태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주의하지 말고, 주님 자신이 누구이신지만 보라고 하셨다. 단 한 번의 계시(啓示)로 주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보는 즉시 모든 실패는 사라져 버린다. 그러므로 각 서신마다 주님은 그분께서 누구이신지를 말씀하셨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은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아느냐에 달려 있다.
어느 교회를 선택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칠’이라는 수가 명확하게 삼과 사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베소에 이어 온 것이 서머나이고, 서머나에 이어 온 것이 버가모이다. 이 셋은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에 한 부류이다. 그다음의 넷이 또 한 부류이다.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이 넷과 앞의 셋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사데가 이 땅에 있는 동안 두아디라도 여전히 이 땅에 있고, 빌라델비아가 이 땅에 있는 동안 사데도 이 땅에 있으며, 라오디게아가 이 땅에 있는 동안 빌라델비아 역시 이 땅에 있다. 바꾸어 말해서, 뒤의 네 교회는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들은 동시에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마치게 된다. 오늘날 우리 앞에 이 네 교회가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개신교가 출현했을 때는 로마 가톨릭교가 이미 천여 년 동안 있어 온 때였다. 빌라델비아가 출현했을 때는 이미 개신교가 삼백 년 이상 있어 온 때였다. 라오디게아가 이 땅에 출현했을 때는 빌라델비아가 이미 몇십 년 동안 있어 온 때였다. 오늘날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에게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이 네 가지의 다른 교회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서로 다른 네 가지 교회이다. 우리는 이것을 로마 가톨릭교, 개신교, 서로 사랑하는 ‘형제들’, 형제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네 번째의 형제회는 이미 라오디게아의 위치로 떨어졌고 이미 하나의 종파로 변질되었다. 주님의 뜻은 빌라델비아에 있다. 우리가 본 일곱 서신 가운데서 오직 빌라델비아만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께 칭찬을 받았다. 오늘날의 빌라델비아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유일한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거듭난 형제가 있다고 하자. 우리가 감히 그를 형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리가 분명한 사람도 형제이고, 분명하지 않은 사람도 형제이다. 그가 집에 살고 있어도 내 형제이고, 그가 길에서 넘어져 시궁창에 빠져 있어도 내 형제이다. 그 형제가 천 번, 만 번 잘못해도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낳으셨다는 것을 탓할 수 있을 뿐이다. 빌라델비아의 특징은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 사랑은 곧 우리가 모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해서 형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가 물속에 잠겼어도 거듭난 것이고, 물속에 잠기지 않았어도 거듭난 것이다. 형제의 근거는 생명이지 침례가 아니다. 교통을 갖는 근거는 피와 성령의 생명에 있는 것이지, 지식 심지어 성경의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 위치에 서는 것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이것 외의 것을 가지고 와서 몇 가지 조건을 더하게 되면, 그것이 교파이다.
이기는 이를 부르심
이 일곱 서신들에서 주님은 이기는 것에 대해 일곱 차례 말씀하셨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게 “회개하여라.”라고 말씀하셨다. 어떻게 이기는가? 그것은 첫째가는 사랑을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데 달려 있다. 서머나에서 이기는 것은 다름이 아닌, “죽기까지 신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줄 것이다.”(계 2:10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서 볼 수 있다. 버가모에서는 주님께서 발람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반대하셨으므로 발람과 니골라당의 가르침을 거절하는 사람이 바로 이기는 이이다. 두아디라에도 여전히 이세벨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데에는 살아 있는 몇 사람이 있으나 사데 자체에는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주님은 흰옷을 입은 사람이 이기는 이라고 말씀하셨다. 빌라델비아의 매우 기이한 점은 시련과 환난이 있으나 주님은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으면 이미 이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라오디게아는 객관적인 것만 갖고 있어서는 안 되고 주관적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한다. 여기에 언급된 이기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있어야 하는 분별을 가리킨다. 이기는 이에 대한 약속은 교회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가운데에는 이기는 이와 패배하는 이, 이렇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그 차이점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는 하나의 계획과 표준이 있으신데, 누구든지 하나님의 이 표준에 도달하는 사람은 이기는 이이고, 하나님의 이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기는 이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기는 것은 표준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표준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러분이 이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면 이기는 이인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에 이르지 못하고 표준 이하인 것이 바로 패배인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
마지막으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일곱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 일곱 번 똑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귀가 있는 사람은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우리는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의 눈은 단지 이 일곱 교회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동서고금의 모든 교회를 보신다. 주님의 말씀은 모든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에베소 시대의 느슨해진 상태가 오늘날 빌라델비아에도 생길 수 있다. 서머나 시대는 지나갔으나 오늘날도 그 상황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각 교회들의 상황이 많은 때 한 교회에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모든 상황이 일곱 교회 가운데서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라고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귀가 없어서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우리에게 귀가 있다면 마땅히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바른길을 걸어가게 해 주시기를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든, 무슨 일이 있든 우리는 빌라델비아의 길을 선택해야 한다.
[워치만 니, 교회의 정통,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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