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흐름 141호
하늘에 속한 이상(2) 교회에 대한 이상
교회의 중요성-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임
우리가 신약을 주의 깊게 읽는다면 교회의 중요성을 볼 것이다. 신약은 교회가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고립되시며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는 것을 계시한다. 신약은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라는 것을 특별히 계시한다(엡 3:3~11). 이 시대의 하나님의 갈망은 교회를 갖는 것이다(마 16:18, 엡 5:25~27, 골 1:24~25). 우리는 교회의 중요성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복음 전파, 성도의 함양, 성경을 가르치는 일 등은 모두 교회를 위해야 한다. 복음 전파는 복음 전파만을 위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야 한다. 성도를 함양하는 것도 함양만을 위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야 한다.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단지 성경을 가르치는 것만을 위하지 않고 교회를 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따르면 그와 같은 모든 일은 교회를 위해야 한다. 심지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도 교회를 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교회 건축을 위해 구원받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이다.
교회의 실행성-이 시대에서의 교회의 실행
또한 우리는 교회의 실행성을 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매우 실행적이다. 우리는 사상과 이론이나 가르침 속의 교회, 또는 심지어 이상 속의 교회를 갖지 말고 실행상의 교회를 가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교회의 실행성을 볼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신약은 교회에 관한 교리를 그다지 많이 말하지 않고 교회의 실행에 관한 온전한 그림을 제시한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교회에 관한 교리를 갖고 있지만 신약은 교회의 실행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신약에는 주로 가르침 속의 교회가 아닌 실행상의 교회가 있다. 우리는 교회의 실행성을 보아야 한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많은 기독교의 교사들이 우리가 오늘날 실재의 교회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해 왔다. 어떤 이들은 실재의 교회는 보이지 않으며 보이는 교회는 실재의 교회가 아니라고 말해 왔다. 더 나아가 어떤 기독교의 교사들은 실재의 교회는 장래의 어떤 것이며 현재의 어떤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의 이해에 따르면 실재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장래의 어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날 어떤 실재의 교회를 갖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지금 우리는 교회 시대에 있으며 다음 시대는 왕국 시대가 될 것이다. 만약 교회 시대에 교회가 없다면 교회가 어느 시대에 있을 것인가? 교회가 장래의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다음 시대, 곧 천년왕국이 교회 시대가 아닌 왕국 시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왕국 시대 후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예루살렘 시대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장래의 어떤 것이라는 가르침이 완전히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교회 시대 동안에 존재해야 하고 실행적이어야 한다.
교회의 지방성-교회의 실지적인 표현
다음으로 교회의 실지적인 표현은 지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교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실행하고 있고 따라서 그 실행성을 갖는다면 그것의 지방적 표현을 가져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의 지방성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약에서 교회가 하늘에 있다고 말하는 구절을 찾을 수 있는가? 그러한 구절은 없다. 신약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안디옥에 있는 교회, 고린도에 있는 교회(고전 1:2), 에베소에 있는 교회(계 2:1), 겐그레아에 있는 교회(롬 16:1)를 말한다. 이 모든 교회들은 지방 교회들로 불릴 수 있다. 신약의 끝에 일곱 도시에 있는 일곱 교회(계 1:4, 11, 2:1, 8, 12, 18, 3:1, 7, 14)의 그림이 있다. 신약에서는 교회의 실지적인 표현이 지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분명하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교회의 유일한 하나-교회의 합당한 터
우리는 또한 교회의 유일한 하나의 이상을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교회의 하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유일한 하나, 하나뿐인 하나를 말하는 것이다. 장로교에 어떤 종류의 하나가 있을지 모르고 감리교에는 다른 종류의 하나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는 교회의 유일한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다른 종류의 하나가 아닌 유일한 하나이다. 교회의 유일한 하나에는 우리가 말하는 교회의 터가 포함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의 좋은 땅에서 예루살렘을 그 중심으로 하는 하나를 가졌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였다. 그들에게는 한 종류의 합일 이외에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상황은 바뀌었다. 그들 대부분이 바빌론으로 잡혀갔으며 일부는 아시리아와 아라비아로 잡혀갔다. 그들은 흩어졌고 그 결과 유일한 하나를 잃어버렸다. 바빌론에 있는 이들 중 일부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모여 합일을 실행합시다.” 그들은 합일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유일한 합일이 아닌 바빌론에 있는 합일이었을 것이다. 아시리아와 아라비아로 끌려간 이들도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바빌론의 합일 외에 아시리아의 합일과 아라비아의 합일도 있었을 것이다. 각 단체는 자체로는 합일이 있었겠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참되고 유일한 합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칠십 년이 지나 주님 편에 서서 그분의 말씀을 취한 일부 신실한 이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잃어버린 합일을 회복하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실행한 합일은 유일한 합일, 하나뿐인 합일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흩어지고 신실한 이들이 돌아온 후에 많은 합일들이 있었지만, 예루살렘의 합일만이 유일한 합일이었다. 다른 것들은 참 합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분열적인 합일이었다. 실지로 소위 말하는 그 합일들은 분열이었다. 오직 예루살렘의 합일만이 유일하고도 하나뿐인 합일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의 하나를 위해 유일하게 하나의 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한 터 외에 다른 것을 갖는다면 그 하나는 깨질 것이다. 하나를 위한 유일한 터가 하나의 합당한 터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하나의 합당한 터는 유일한 하나의 터이다. 이것은 여러 교파들이나 집단들의 하나가 아니라 성도들이 있는 곳, 즉 각 지방에서 표현된 교회의 유일한 하나이다.
교회에 관한 분명한 이상을 위해 주님께 간구함
우리는 이 장에서 강조한 네 가지 사항을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그리스도를 위해 교회를 갖는 것이며, 교회는 실행적인 것이고 이론 속의 어떤 것이나 가르침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또 교회는 지방적이며 교회에는 합당한 터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보아야 한다. 나는 당신에게 이 네 가지 요점들에 관해 명확한 방식으로 기도하기를 권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진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 요점들에 관해 단순해질 필요가 있다. 복잡해지지 말고 단순한 가운데 주님께서 이 네 요점들에 대해 분명한 이상을 보여 주시기를 간구하라.
[위트니스 리, 하늘에 속한 이상,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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