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36호
좋은 땅의 풍성한 양식(1)
“그 땅은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석류가 있는 땅이며, 올리브나무와 그 기름과 꿀이 있는 땅입니다.”(신 8:8)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님은 자신이 밀알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2:24). 보리도 역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또한 주님은 자신이 포도나무라고 말씀하셨다(요 15:1). 무화과나무도 역시 그리스도 자신이다. 올리브나무 또한 틀림없이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의 어떠한 면들을 상징하는가?
밀과 보리
밀은 그리스도의 어떠한 면을 나타내는가? 요한복음 12장 24절에서 주님께서 죽고 장사되기 위해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밀은 육체가 되신 그리스도, 죽으신 그리스도, 장사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러면, 보리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가나안 땅에서 보리는 언제나 제일 먼저 익는다. 모든 곡식 중에서 보리가 첫 번째이다. 모든 성경 연구가는 추수한 첫 곡식이 부활의 첫 열매인 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레 23:10, 고전 15:20). 당신은 밀이신 그리스도와 보리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해 본 적이 있는가?
밀의 체험
우리는 주님의 주권 아래서 제한받고 억압당하는 상황 속에 넣어질 때마다 밀이신 주님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 제한받고 억압당하는 상황 가운데에서 주님을 접촉할 때 그분은 한 알의 밀과 같으시다. 그분을 접촉하자마자 즉시 자신의 상황에 완전히 만족할 수 있다. 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 자신인 그 생명은 하나의 밀알이다. 그것은 작은 목수, 육체를 입으신 분, 제한되신 분의 생명이다. 제한되고 억눌림당하는 어떤 환경에서 그리스도를 생생하게 접촉했을 때, “오, 주님! 당신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당신은 유한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당신 안에는 어떠한 제한도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습니다.”라고 외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밀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어느 자매가 시어머니에게서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런 상황에서 자신을 건져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다. 그녀가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은 그녀에게 주님께서 삼십 년 이상이나 그 작은 가정에서 한 사람의 목수로서 계시면서 얼마나 많은 제한을 받으셨는지를 보여 주셨다. 그 자매는 마음속에서 그러한 광경을 보고서, “주님, 당신을 찬양합니다. 제한받으신 당신의 생명이 제 안에 있습니다. 주님, 저는 현재의 상황에 만족합니다. 당신에게 아무것도 바꿔 달라고 구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당신을 찬양할 뿐입니다!”라고 울며 외쳤다. 이 자매는 한 알의 밀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했던 것이다.
보리의 체험
밀 다음에는 보리가 있다. 무덤은 주님의 종말이 아니었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밀 다음에 보리가 왔다! 밀은 죽음의 골짜기이다. 그러나 보리는 부활의 산이다. 우리가 밀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때마다 보리이신 그리스도의 체험이 뒤따를 것을 확신하라. 그러나 밀알, 즉 제한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려면 보리, 즉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신 그분을 적용해야 한다. 우리 안에 살고 계신 분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육체 되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장사되심의 과정을 거친 생명을 가지고 계신다. 육체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항상 제한을 받으셨지만,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제한받지 않으시고 완전히 해방되신 분이시다. 우리가 제한받으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바로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무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오늘 우리는 제한받으신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나, 무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따른다. 화를 내기는 쉽다. 그러나 인내는 능력을 요구한다. 성질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오래 참는 것은 하늘에 속한 힘이 필요하다. 우리를 제한받게 하는 것은 주님의 부활 능력이다. 나는 조금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얻는 데에도 내 안에 살아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의 인내로서 적용하는 것이 바로 보리이신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우리가 내적으로 그리스도를 밀과 보리로서 인식하도록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체험에 의해 우리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고 하나의 보리떡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일 수 있다.
포도나무의 체험
포도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사사기 9장 13절은 “포도나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더러 하나님과 사람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새 포도주를 내는 일을 버리고 …’”라고 말한다. 한 면으로 그것은 희생하시는 그리스도, 즉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또 다른 면에서 주님께서 그분의 희생으로부터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새 포도주를 생산하셨다. 우리는 그러한 그리스도를 체험했는가? 때때로 주님의 주권 아래,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을 접하게 될 때, 그때가 바로 우리가 포도주를 생산하는 포도나무이신 주님을 누릴 때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분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한다. 이 체험으로부터 우리는 포도나무가 된다. 즉 사람과 하나님을 모두 기쁘게 하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사람이 된다. 과거에 어느 자매는 항상 원망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목욕을 할 때에는 물이 충분히 뜨겁지 않다고 불평하고, 식사를 할 때는 음식이 너무나 식었다고 불평했다. 하루 종일 “이건 왜 이렇지?”, “저건 왜 이렇지?”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 자매는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녀 자신도 행복하지 못했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포도주가 부족했던 것이다. 그 자매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포도주를 생산하려고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 포도주 생산자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한 일이 없었다. 우리는 포도주이신 주님으로 취해서 주님께 미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장 이기적이지 않은 사람이다. 가장 이기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가장 비참하다. 우리는 어떻게 희생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희생할 힘이 없다. 우리의 생명은 선천적으로 이기적인 생명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희생의 생명이다. 만일 포도주이신 그리스도를 접촉하고, 그분의 희생하는 생명을 체험한다면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희생하도록 격려하며 강건하게 해 주실 것이다.
[위트니스 리,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5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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