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빌 4:6-7)
사람이 기뻐하고 근심하지 않으려면 무거운 것을 짊어져서는 안 된다. 성경에 의하면 무거운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죄의 무거운 것이요, 다른 하나는 염려의 무거운 것이다.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기쁨은 없다. 염려가 해결되지 않아도 기쁨은 없다. 죄의 무거운 것은 해결되었으나 염려의 무거운 것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기쁨 또한 완전하지 않다. 반드시 죄와 염려가 다 해결되어야 기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이 죄의 무거운 것은 이미 해결되었지만, 염려의 무거운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기뻐할 수 없게 된다. 기뻐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몫이 아니다. 당신에게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생활이 아니고 마땅한 태도가 아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내가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기뻐하십시오’가 하나님의 명령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명령은 모두 사람이 능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우상을 숭배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한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가? 기뻐함이 하나님의 명령일진대 우리는 마땅히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기뻐하는 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쁘지 않을 때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나의 몸이 좋지 않고, 일도 많아 힘들고, 자녀들도 많고 말도 듣지 않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많은 일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기뻐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서 당신 자신을 의지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경 안에서 기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다. 환경에서 어려움을 받아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릴 때에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분을 바라봄으로 인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분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도록 하십시오.”
‘관용’은 원문에 중용지도(中庸之道)—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게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음—의 사상으로 나와 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약간의 일을 당하고도 태산에 눌리는 것 같다면 중용이 아니다. 세상 어려움이 우리를 누를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신다. 이 즐거움은 큰 것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루하루를 생활할 때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쁨으로 지낼 수 있게 한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빨리 오신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원문에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다. ‘가까이’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며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가까이 계시고 우리 곁에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기뻐해야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우리는 염려할 만한 많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염려할 만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신다. 모든 염려는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생활 문제나 가정의 일이나 개인의 어려움 등을 염려할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염려가 전혀 없는 것이 합법적인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어떤 염려든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염려해야 하고 저것도 염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심지어 염려하는 것을 그의 본분으로 여긴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은 염려하지 않더라도 그 한 가지 일만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설마 한 가지 염려도 있어서는 안 되는가?”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한 가지 염려도 있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당신이 염려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주님의 마음과 그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는데도 당신이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의심하는 것이다.
“다만(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여러분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어떻게 염려가 없을 수 있는가? ‘오직!’ 이렇게 하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은 앉아서나 누워서나 걸으면서 할 수 있다. 무엇을 하는가? 세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첫째는 기도이다. 이것은 보통 기도이다. 둘째는 간구이다. 이것은 당신의 마음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셋째는 감사이다. 감사함으로 당신의 필요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당신은 모든 일에 기도로 하나님께 말씀드려야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께 간구로 말씀드려야 하고,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말씀드려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이와 같이 행하지 않기 때문에 염려가 가득하게 되고 기쁨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난 일을 하나하나 모두 하나님의 손에 놓을 수 있다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첫 번째 일을 당신 자신에 두고, 두 번째, 세 번째 일이 와도 당신 자신에 놓아, 짊어지면 짊어질수록 눌림을 받게 되고 기쁨을 잃게 된다. 나는 집을 짓는 일꾼들이 벽돌을 지붕까지 운반하는 것을 보았다. 세 사람이 사다리의 상·중·하 부분에 서서 아래에 있는 사람이 벽돌을 중간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고, 중간에 있는 사람은 다시 위에 있는 사람에게 보내어 멈추지 않고 보내는 것이었다. 만약 중간에 있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벽돌을 다시 위로 보내지 않거나, 위에 있는 사람이 중간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온 벽돌을 받지 않는다면 중간에 있는 사람은 계속적으로 오는 벽돌의 압력에 의해 눌려 죽게 된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도 이와 같다.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온 염려를 모두 하나님께 보내어 지우지 않는다면 염려가 우리를 압사시킬 것이다. 염려가 계속 우리를 누르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염려를 하나님께 놓아야 한다. 언제든지 당신에게 염려가 있을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일들을 기도로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 기도가 우리의 출로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출로이다.
[워치만 니 전집, 18권, 3장,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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