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남의 비밀 (1)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교양 있고, 대단히 종교적이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뛰어난 신사였고 상류층 사람이었다. 첫째로 그는 교육면에서 최상의 수준에 오른 선생이었다. 유대인들의 선생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인 구약을 가르쳤다. 둘째로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관원’이었다. 그는 어느 정도 존경받고 권위 있는 위치에 있었다. 셋째로 그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노인으로서 그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넷째로 그는 틀림없이 도덕적인 사람, 즉 선한 사람이었다. 그가 말하는 방법을 볼 때 그가 도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섯째로 니고데모는 진실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바리새인들을 어느 정도 두려워했지만 그래도 그는 밤에 주 예수님께 왔다. 이것은 그가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여섯째로 그는 매우 겸손했다. 니고데모는 아마 육칠십 세쯤 되는 노인이었지만 삼십 세를 약간 넘은 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왔다. 그러한 경험 있고, 최상의 교육을 받은 나이 많은 사람이, 그보다 훨씬 젊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왔다는 것은 그가 겸손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더욱이 니고데모는 선생이었지만 주 예수님을 랍비(Rabbi)라고 불렀다. 유대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을 랍비라고 부르는 것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일곱째로 니고데모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그가 정직한 사람임을 드러낸다. 당신은 니고데모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는 뛰어난 수준의 학식과 높은 도덕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의 필요
니고데모가 주 예수님께 왔을 때 주님은 사람의 참된 필요를 드러낼 기회를 갖게 되셨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선한가에 관계없이 여전히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것을 드러내셨다. 거듭남이 사람의 첫 번째 필요이다. 부도덕한 사람뿐 아니라 도덕적인 사람도 거듭남이 필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단지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거듭남이 필요하다는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하지 않았을지라도 여전히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아담이 설령 타락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거듭나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 아담이 생명나무를 취했더라면 그는 거듭났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모두 사람의 생명이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람의 생명이 좋든 나쁘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어떤 종류의 인간의 생명을 갖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사람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갖고 있는 우리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신성한 생명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신성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의 생명을 갖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실지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거듭남에 대한 진정한 의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남은 단지 우리가 타락했고 죄가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이 사실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이러한 관념에 따르면, 우리의 생명이 나쁘고 개선될 수 없기 때문에 거듭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잘못된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에덴 동산에 있었던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었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갖기 위해서는 거듭남, 즉 다시 태어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 자신인 신성한 생명을 영접하는 것이다.
거듭남의 의미
거듭남의 의미는 무엇인가? 거듭남은 어떤 종류의 외적인 개선이나 수양이 아니다. 생명이 없는 어떤 단순한 변화나 전환도 아니다. 거듭남은 새 생명을 가져오는 다시 태어남이다. 전적으로 생명의 문제이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생명과는 다른 생명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부모에게서 사람의 생명을 받았다. 이제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얻을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우리가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또 하나의 생명을 소유하기 위해 또 한 번의 출생을 필요로 한다.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은 우리 자신을 교정하거나 바로잡는 것이 아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것이 부모의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남은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며(요 1:13), 하나님에게서 태어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을 갖는 것이다(요 3:15-16).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위를 준다(요 1:12). 왜냐하면 이 생명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할 수 있고(벧후 1:4) 하나님과 생명 관계, 즉 아들의 자격(the sonship)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롬 8:15, 갈 4:5-6, 대부분 한글 성경에서 ‘양자(adoption)’라고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원문에서 ‘아들의 자격’(the sonship)임).
사람과 종교의 잘못된 관념
인간의 문화와 유대 종교로 인하여 니고데모는 사람이 처신하는 데 필요로 하는 것을 추구했다. 사람은 선한 행동을 가져야만 하고 합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가르침이 필요하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에게서 온 선생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더 나은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님은 다음 절에 있는 답변으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임을 밝히셨다. 거듭나는 것은 자연적인 출생에 의해 받은 인간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진정한 필요는 더 나은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었다. 니고데모는 지식의 나무에 속해 있는 교훈을 추구했지만 주님의 답변은 생명나무에 속한 생명의 필요로 그를 향하게 했다(창 2:9-17 참조).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그에게 필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임을 아주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의 진정한 필요는 또 다른 하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우리 모두의 필요는 규제하거나 고치기 위한 종교나 교훈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생명, 즉 우리를 거듭나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임을 깨달아야 한다. 니고데모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그의 인간적이고, 전통적이고, 종교적인 관념을 초월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니고데모,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교훈이 아니라 다른 하나의 생명이다. 그대가 얼마나 선한가에 상관없이 단지 인간의 생명만을 갖고 있다. 그대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하다. 니고데모, 그대는 지식을 추구함으로써 지식의 나무의 노선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그대는 생명나무의 노선에 있지 않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그가 잘못된 나무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위트니스 리, 요한복음 라이프 스터디,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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