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 은혜와 긍휼 하나님의 사랑
구약성경은 여러 차례 구원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구원의 일이 사람에게서 시작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왜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는가? 하나님은 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가?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동시에 그분은 세상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을 구원하실 필요가 없다. 구원이 이루어진 이유는 한 면으로 사람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며 또 한 면으로는 하나님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에게 죄가 있는데 하나님께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끝이다. 오늘날 구원이 이루어지고 복음이 전파되는 이유는 하나님께 사랑이 있는 반면에 사람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죄는 우리에게 사람의 필요를 보여 주고,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공급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세 방면이 있다. 첫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며,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표현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 자신을 말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말한다. 또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표시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는 무엇인가? 로마서 5장 8절은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라고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타난다는 놀라운 사실을 보여 준다. 우리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려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께서 사랑이시므로, 은혜의 문제가 생긴다. 사랑은 귀한 것이지만 반드시 표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표시가 없다면 은혜를 이룰 수 없다. 은혜는 표현된 사랑이다. 사랑은 하나님 안의 이야기이고 이 사랑이 당신에게 올 때 즉시 은혜가 된다. 안에 있는 사랑은 추상적인 것이지만 밖으로 표현된 은혜는 구체적인 것이다. 가령, 당신이 어떤 구걸하는 사람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를 사랑하고 불쌍하게 여긴다고 하자. 그런데 당신이 그에게 밥 한 그릇이라도 가져다주고, 옷 한 벌이라도 입혀 주며, 돈을 조금이라도 줄 때 당신의 사랑은 은혜로 변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은혜의 차이점은 바로 사랑은 내적인 것이고 은혜는 외적인 것이라는 데 있다. 사랑은 안의 느낌에 강조점이 있고 은혜는 밖의 행위에 강조점이 있다. 사랑이 행동으로 변할 때 곧 은혜가 된다. 은혜의 그 느낌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이는 은혜가 있을 수 없으며, 은혜가 있는 이유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향하여 흐를 때, 그것은 단순히 사랑으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사랑이 낮은 데로 흐를 때, 그것은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낮은 데 거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은혜를 얻을 수 없다. 오직 낮은 데 처한 사람만이 은혜 받는 날이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랑과 은혜의 차이이다.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님의 은혜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전한 안부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고후 13:14)라고 말했다. 당신이 이 순서를 바꾸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주 예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주 예수님께서 구원을 성취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현하신 것이요, 은혜를 성취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 예수님의 일로 인하여 은혜가 되었다.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은혜가 있을 뿐 아니라 긍휼도 있다. 사랑의 출로는 은혜로 향하지 않으면 긍휼로 향한다. 긍휼은 소극적인 것이고 은혜는 적극적인 것이다. 긍휼은 현재 상황을 어떻게 불쌍히 여기는가를 말하고 은혜는 장래의 상태에 대하여 어떻게 구출되고 광명한 앞길을 가게 되는가를 말한다.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가지신 느낌을 긍휼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이것을 은혜라고 한다. 구약 시대 4000년 동안 하나님은 계속 긍휼을 베푸셨다. 그러나 오늘날 신약에 이르러서 주 예수님께서 이미 일을 이루셨고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신약에는 은혜가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주 보배로운데 왜 또 긍휼이 있어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근원인 사랑도 좋고 결과인 은혜도 아주 좋은데 왜 꼭 긍휼이 필요하냐고 물을 것이다. 사람인 우리는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는 존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구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요구할 담력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육체에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그리 분명히 알지 못한다. 비록 빛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분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분을 가까이할 담력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분 앞에 나아가서 사랑을 구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느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는 결코 무엇을 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도 그렇게 큰 믿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기에 사랑이 있고 은혜가 있을 뿐 아니라 긍휼도 있다는 것이다. 사랑은 긍휼 안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당신이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의 긍휼로 인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른 것을 구할 담력은 없으나 긍휼히 여기심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르짖음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갈 권리를 얻도록 그분의 사랑을 우리 가운데 두셨다. 그러나 만일 사랑만 있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을 가까이할 담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구할 담력도 없고 나를 은혜로 대해 달라고 구할 담력도 없지만 그분의 긍휼은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십시오.”(유 21) 이 구절은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주 예수님께서 오실 때 곧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려야 함을 알려 준다.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고 이미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러나 우리 몸은 아직 구속받지 않은 한 가지 일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살 동안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하고, 동시에 그날 주님께서 당신을 긍휼히 여기시도록 그분을 앙망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여전히 긍휼이 필요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들어올리시기까지 그분의 긍휼을 앙망해야 한다.
[워치만 니, 하나님의 복음,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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