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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흐름 95호 

산에서 보여 준 모형에 따라(2)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속한 것들의 모조품과 그림자입니다.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려고 할 때에도 ‘너는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신중하게 만들어라.’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히 8:5)

다른 불

영적 일에서 가장 긴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산에서 보여주신 식양 곧 모형을 아는 것이고 그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성경의 많은 본이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각자 자기 향로를 가져다가, 거기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놓았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바쳤다. 그러자 여호와 앞에서 불이 나와 그들을 태워 버렸고, 그들은 여호와 앞에서 죽었다.”(레 10:1―2). 제사의 규례에 있어서, 반드시 제단에 있는 불로 분향해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의 잘못은 제단 위의 불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불’을 사용하여 분향한 데 있다. 그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다. 제단은 십자가의 예표이다.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십자가의 제단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한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자아가 죽는 것이요,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생활하시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하는,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이다. 십자가는 자아의 지혜와 의견과 능력과 열심과 소망과 기쁨을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처리를 거친 후에야 하나님 앞에서 봉사를 할 수 있다. 아, 얼마나 많은 열심들이 ‘다른 불’인지! 십자가의 처리를 거치지 않고 자기의 의견과 총명을 버리지 않는 것은 다 육체의 뜻을 따른 것이다. 이일 저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을 더 부흥되게 하고 하나님의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열심을 내지만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도 불이기는 하지만 제단 위의 불이 아닌 다른 불에 불과하다. 십자가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다 ‘다른 불’이다. ‘다른 불’은 바로 자아의 불이다. ‘다른 불’이란 하나님의 일에서 자아의 방법과 지혜로 자아의 주장을 실행하는 것이다. 다른 불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얻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죽음을 당하게 한다.

 

사울의 제물 

사울이 스스로 번제를 드린 일이 우리에게 큰 경계가 된다(삼상 13:8―14). 사울이 제물을 드린 데에는 세 가지의 큰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그가 그의 백성들의 흩어짐을 보았기 때문이요, 둘째로는 사무엘이 정한 날에 오지 않았기 때문이요, 셋째로는 그들의 적인 블레셋 사람들이 믹마스에 진을 치고 길갈에 있는 그들을 공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번제를 드린 것이다. 사울은 거기에서 무슨 악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을 뿐이다. 그는, “아마 기도를 하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았나 보다. 기도를 더 하면 하나님께서 받아 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을 더 섬기고 하나님을 더 봉사하면 하나님의 백성을 적의 손에서 구출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러자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였다. ‘여호와 왕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계명을 왕이 지키지 않으셨으니, 어리석게 행동하신 것입니다. …여호와는 그분 자신을 위하여 그분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으셨고, 여호와는 그 사람을 그분의 백성을 다스릴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왕이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13-14절)라고 말했다. 사울이 말한, ‘내가 이르기를 (내가 생각하기를)’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분부하심을 따라 그분을 섬기기 원하실 뿐,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라 봉사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자기의 생각을 따라 한 봉사는 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에 합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중히 여기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느냐에 있다. “순종하는 것이 제물보다 낫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많은 경우 우리도 사울과 같이 행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자기의 필요와 환경의 필요만을 보고,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기를 잊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지 않은 것을 행하는 것이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은 그가 너무 열심히, 너무 급하게 제물을 드렸기 때문이다.

 

웃사의 손

“다윗은 그분의 이름 곧 그룹들 사이 보좌에 앉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하나님의 궤를 바알레유다에서 가지고 올라오려고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과 함께 일어나 나아갔다.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가지고 나왔다. 아비나답의 아들들인 웃사와 아히오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언덕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가지고 나왔고, 아히오가 궤 앞에서 갔다. …그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소들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웃사가 궤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웃사를 향한 여호와의 진노가 불붙었다. 그가 잘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그를 치셨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 옆에서 죽었다”(삼하 6:1―7).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읽을 때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웃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붙든 것은 웃사의 공로일텐데 왜 여호와께서는 도리어 그를 치셨을까? 하나님의 영광은 언약궤에 있다. 웃사가 언약궤를 붙든 것은 선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를 쳐죽이셨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의 일을 돕는 것보다 그분의 명령을 듣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영광을 부축할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문제는 언약궤가 넘어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일을 행함에 있다. 사람들은 모두, “언약궤가 평안하고 무사할 때에는 만질 수 없지만, 언약궤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는 넘어지지 않게 만지거나 부축할 수 있다. 이것은 임기응변이므로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명령하시지 않은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육체적인 죽음이 없더라도 반드시 영적인 죽음이 있을 것이다.

[워치만 니, 전집 2집 18권,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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