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99호
생명나무-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길
하나님의 목적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있다. 여섯째 날에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분의 권위를 사람에게 위임하셨다(26절). 형상은 표현을 뜻한다. 당신의 형상 안에 있는 어떤 것은 당신 자신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을 이 우주 안에서와 이 땅 위에서 그분 자신의 표현으로 삼으시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은 감추어져 계시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그분은 사람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표현하시고자 하는 마음의 갈망을 갖고 계신다. 왜 하나님은 그분의 권위를 사람에게 위임하셨는가?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지만 그 목적은 원수 사탄 때문에 크게 좌절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원수 사탄을 처리하기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셔야 했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권위를 사람에게 위임하셨는데, 이것은 사람이 그분의 표현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그분의 대표가 되어 이 땅 위에서 그분의 원수를 처리하는 바로 그 권위로서 그분을 대표하게 하려는 것이다. 성경 66권 전체에는 언제나 이 두 면이 있다. 하나님의 뜻의 긍정적인 것을 이루는 면은 단체적인 한 사람을 통하여 그분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고, 부정적인 것을 처리하는 면은 이 단체적인 한 사람을 통하여 그분의 원수 사탄을 처리하는 것이다. 성경의 끝부분에는 새 예루살렘이라 불리는 한 성이 나온다(계 21:2). 이 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되고(계 21:11, 4:3) 하나님의 권위가 행사된다(22:5, 21:24-26). 이 성이 바로 하나님의 표현이며 대표이다.
생명나무를 먹음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목적과 뜻은 있지만 그 목적을 달성하고 그 뜻을 성취하는 길은 없다. 그 길은 창세기 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엇이 그 길인가? 그 길은 바로 생명나무이다(9절). ‘형상’과 ‘다스림’이란 단어들이 계시된 후에 2장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창조된 인간들로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나를 사진에 담을 수는 있겠지만 그 사진은 생명이 없이 단지 나의 어떤 형상만을 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당신 안에서 살아 계신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살아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길이 이 생명나무에 나타나 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표하는 권위의 문제도 이 생명나무에 달려 있다. 당신 속에 생명나무가 없다면,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으로 당신 안에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당신이 그분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목적인 그분의 표현과 대표, 이 둘을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셔야 한다. 하나님의 표현과 대표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사실 필요가 있으시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계명이 나열된 목록을 주지 않으셨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 후에 이루어진 모세의 일이지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른 하나님의 일이 아니다. 율법은 출애굽기 20장에서야 언급되며 창세기 2장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창세기 2장에는 하나님께서 창조된 사람을 대하시는 첫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언급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 어떤 것이 처음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원칙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하실 때 최초에 언급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생명나무 앞에 두시고 아담에게 먹는 것을 조심하라고 이르신 것이다(16-17절).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행하는 것에 있지 않고 먹는 것에 있다. 이 생명나무는 곧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한, 그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종교적이고 형식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하나님을 먹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첫 그림은 일하는 그림이 아니라 먹는 그림이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사람에게 음식의 형태로 제시하셨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께서 계셨고 그 말씀께서 곧 하나님이셨으며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말한다(요 1:1, 4). 어느 날 그분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사람을 먹인 기적을 행하셨다(6:9-13).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그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지만 그분은 용납하지 않으셨다(6:15). 그 후에 그분은 그분께서 오신 것은 외적으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왕이 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생명의 떡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다(6:35, 57). 그분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먹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섬기고 경배하고 영화롭게 할지 숙고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다만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양식으로 여기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음식 형태의 생명으로 제시하기 위해 오셨다. 우리는 그분을 양식으로 삼아 먹음으로써 그분을 우리의 음식으로 취해야 한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요 6:57하)
행하는 것에서 먹는 것으로 바꿈
주님께서 당신의 관념을 행하는 것에서 먹는 것으로 바꾸어 주시기 바란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강조하는 것은 행함과 수고이다. 기독교는 행하는 종교, 일하는 종교, 수고하는 종교로 전락하였다. 하나님의 처음 의도는 사람이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잔치로 누리고 먹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을 누리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4장 24절은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경배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4장 전체의 문맥에 따르면 주님께서 뜻하신 것은 14절에서 주님을 생수로 마시는 것이 곧 24절에 있는 주님께 드리는 경배라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을 생수로 마신다는 것은 당신이 주님을 경배한다는 의미이다. 당신이 주님을 더 많이 마실수록 당신은 주님으로 더욱 채워지고 주님은 경배를 더욱 받으실 것이다. 주님을 경배하는 최고의 방법은 주님을 마시고, 주님을 먹고, 주님을 누리며, 주님을 섭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양식으로 취하고 어떻게 주님을 먹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처음으로 주님께서 생명으로(1:4), 생명의 떡으로(6:35), 생수로(4:14), 생명의 호흡인 공기로(20:22) 언급되셨다. 그분은 생명이시요 양식이시요 음료수이시요 공기이시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을 일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누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당신은 주님을 생명과 양식과 물과 공기로 누려야 한다. [위트니스 리, 생명나무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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