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흐름 73호
믿음의 의미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 다른 종교는 기독교처럼 믿음을 강조하지 않는다. 석가모니나 공자는 “나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일백오십 번이나 반복한다. 믿음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한 믿음을 반복하고 강조한다. 믿는 것은 곧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록 ‘믿음’이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일백오십 번, 구약에서 그 이상 쓰였을지라도 오직 한 구절에 그 단어의 뜻이 설명되어 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믿음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질화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확증입니다.”(헬라어 원문, 회복역 참조)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질화임
만일 우리가 무심코 이 구절을 읽어 버린다면, 믿음의 의미를 이해한 것처럼 생각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질화(substantiation)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이 정의에 관해 생각해 본다해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실질화’라는 단어를 깨달으려고 혼자서 적어도 수년을 보냈다. 실질(substance), 곧 실체라는 단어는 비교적 이해하기가 쉽다. 책상의 실질은 나무요, 못의 실질은 철이다. 그러나 ‘실질화’란 무엇가? 실질화 혹은 실체화라는 것은 실질을 깨닫게 하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당신은 책상을 볼 때 그것의 실질이 나무임을 깨닫는다. 또 책상의 못을 보자. 그것을 살펴본 후에 당신은 이 못의 실질이 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 능력이 실질화(실체화)시키는 힘이다.
오감(五感)의 기능
우리 주위의 세계는 다양한 색과 모양을 가진 수만 가지의 물체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우리 안에도 많은 형태와 물체가 있다. 그것들은 그것들 자신의 세계를 형성한다. 이 안의 세계와 바깥 세계 사이에는 끊임없는 상호 교류가 있다. 바깥 세계의 자극이 안의 세계로 전달되고, 안의 세계는 바깥 세계에 반응하여 반향한다. 두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 기관이 바로 오감(five senses)이다. 이 오감을 통해 바깥 세계의 자극이 우리 안에 들어와 어떤 인식을 낳게 되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바깥 세계에 전달한다. 만약 사람에게서 오감을 제해 버린다면 바깥 세계의 어떤 것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다. 우리 주위의 세계에는 스펙트럼에 나타나는 모든 색깔이 있다. 그러나 만약 사람에게 눈(eye)이 없다면 이러한 색깔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색깔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색깔을 실질화시키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그에게 눈(snow)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왜 눈이 그렇게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눈의 하얀색이 매력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도대체 하얀색이 무어냐?”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하얀색은 검정색의 반대라고 말하면 그는 “검정색이 어떻게 생겼는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 세계에는 모든 종류의 색깔이 있다. 그러나 그 색깔들은 오직 눈(eye)의 실질화시키는 능력을 통해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시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다. 그들 안의 세계에는 아무 색깔도 없다. 또한 우리에게 귀가 없다면 소리는 아무런 효과도 주지 못할 것이다. 또 우리의 미각(味覺)과 후각(嗅覺) 능력을 요구하는 것들도 있다. 오감의 기능은 모든 객관적인 것들을 우리 안으로 전달하여 주관적인 체험이 되게 한다. 만약 이 오감이 없다면 모든 바깥 사물은 바깥에 남아 있을 뿐 결코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 것이다. 두 세계 사이에는 영원히 장애물이 있을 것이다. 오감이 하는 일은 실질화시키는 일이다. 매일 나는 수백 만의 물체를, 실질화시키는 기관을 통해 내 안으로 실질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바깥 세계와 접촉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리켜, 바라는 것들을 실질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적인 것을 실질화하는 기관
믿음이 무엇인지 보여 주기 위해 하나님은 ‘실질화’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당신 안으로 실질화될 수 있는가? 여기에 믿음이 작용한다. 눈은 보는 기관이요, 귀는 듣는 기관이요, 코는 냄새 맡는 기관인 것처럼 믿음은 모든 영적인 것을 우리 안으로 실질화시키는 기관이다. 믿음이 없이는 모든 영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믿음을 가리켜, 바라는 것들을 실질화시키는 것이라 말한 이유이다. 영적인 것들은 실재하는가, 실재하지 않는가? 당신은 그것을 (물질적인) 오감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넣으셨고,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가셨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시어 지금은 성령 안에 계신다. 당신은 오감으로 이들 중의 어떤 것을 실질화할 수 있는가? 오감은 이러한 면에서는 쓸모가 없다.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한 눈은 멀어 있고, 귀는 막혀 있으며, 코는 냄새를 맡지 못하고, 혀는 굳어 있으며, 모든 감각 기관은 무뎌 있다. 만일 오감만 사용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도 없으며, 죄들을 용서함이나 죄인의 구속도 실존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을 것이다. 또 새 생명 따위는 없으며, 모든 영적인 것은 다만 환상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실질(실체)은 있지만 실질화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말들 즉 그리스도가 죄들을 용서하심, 예수님의 부활, 새 생명을 얻음 등은 다만 공허한 말들의 집합이다.”라고 말하면서 믿는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은 영적인 것들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인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영적인 것에 관해 눈이 멀어 있다. 그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모든 영적인 것을 실질화시키는 감각이다. 그러한 감각이 없으면 그들에게는 모든 영적인 것이 캄캄할 뿐이다. 이 감각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모든 것을 영적으로 참되고 분명하게 만든다. 물질적인 우주는 실재(實在)한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영적인 세계를 보고 듣는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이 기능, 또는 감각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질화( substantiation)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그것들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게 명확히 나타난다. 추상적으로 보이는 영적인 것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실질화될 수 있는가? 믿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당신은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가지고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당신에게 실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예비하셨고 완성하셨다. 그분은 또한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성령 안에 넣으셨다. 지금 성령은 사람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있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을 때 사람은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게 된다. 귀는 들음으로 소리를 받아들이고, 눈은 봄으로 색깔을 받아들인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성취하신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는 행동이다.
[워치만 니 전집, 2집 7권, 한국복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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